항목 ID | GC07700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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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信川康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 시기/일시 | 1400년대 후반 - 강진경 입향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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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1500년대 후반 - 강혁 입향 추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5년 - 효자 강협 정려 건립 |
본관 | 신천강씨 본관 - 황해도 신천구 |
입향지 | 신천강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발산리 |
세거|집성지 | 신천강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발산리 |고운동|전의면 다방리|전의면 금사리 |
묘소|세장지 | 강진경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포리 |
묘소|세장지 | 강순룡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산울리 |
묘소|세장지 | 강혁 묘소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 산27 |
묘소|세장지 | 효자 강협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발산리 |
묘소|세장지 | 어서각 -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1281 |
묘소|세장지 | 강진경 사당 모선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포리 |
묘소|세장지 | 신천강씨 묘역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 |
성씨 시조 | 강호경 |
입향 시조 | 강진경|강혁 |
[정의]
강호경을 시조로 하고 강진경과 강혁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강호경(康虎景)을 시조로 하고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하는 세종특별자치시 신천강씨는 금남면 발산리와 고운동에 입향한 이래 발산파와 연기파를 형성하며 5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왔다.
[연원]
신천강씨 시조 강호경은 신라 후기 군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6대조이다. 시조 이후 신천강씨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14세손 충렬공(忠烈公) 강지연을 중시조로 한다. 강지연은 몽고 침입 시 고종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충렬왕 때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후손들이 신천을 관향(貫鄕)[시조가 난 곳]으로 삼고 있다.
[입향 경위]
금남면 발산리의 신천강씨 입향조는 강진경(康晋卿)이다. 강진경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충무위부사정(忠武衛副司正)을 지냈다. 예종 때 친척 강순(康純)[1390~1468]이 남이(南怡) 장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공주 계룡산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금남면 발산리로 옮겨 와 신천강씨 발산파 집성촌을 이루었다.
옛 남면 고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고운동·아름동]에 정착한 신천강씨 입향조는 강혁(康赫)이다. 강윤성(康允成)을 파조로 하는 곡산파(谷山派)로, 아산현감(牙山縣監) 등을 지냈다. 연산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에 주로 발산리에 살던 신천강씨는 강혁 대에 이르러 고정리로 옮겨 세거하게 된다. 이후 후손들은 전의면 다방리와 금사리에 정착하여 신천강씨 연기파(燕岐派)를 형성하였다.
[현황]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조선의 성』에는 발산리를 신천강씨 40호가 거주하는 동족마을로 기록하고 있다. 1988년 발산리 신천강씨는 38가구, 고정리 신천강씨는 38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신천강씨는 1985년에는 211가구 853명, 2000년에는 141가구 406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신천강씨는 655명이다.
[관련 유적]
강협(康協)[1674~175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5년(광무 9)에 건립된 효자 강협 정려가 있다. 금남면 발산리에 위치하며,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강순룡(康舜龍)에게 내린 교지를 후손들이 간직하게 되어 건립된 어서각이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발산리 입향조 강진경의 묘역과 사당 모선재(慕先齋)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포리에 위치하며, 매년 음력 10월 6일에 제향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고정리 신천강씨의 묘역이 편입되어 입향조 강혁을 포함한 신천강씨 묘역은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초봉리에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