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99 |
---|---|
한자 | 李仟 |
영어공식명칭 | Yi Cheon |
이칭/별칭 | 동암수,수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상호 |
활동 시기/일시 | 1256년(고종 43) - 이천 온수대첩을 치름 |
---|---|
활동 시기/일시 | 1260년(원종 1) - 이천 문하평장사를 지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2년 - 이천의 장의충절을 기려 대한민국 해군에서 국산 잠수함 1호로 명명 |
출생지 | 이천 출생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 |
부임|활동지 | 온수대첩 - 온수현 |
사당|배향지 | 경원사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의 |
대표 관직 | 응양군대장군|중서시중|문화평장사 |
[정의]
고려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수군 명장.
[개설]
이천은 대몽 항쟁기(對蒙抗爭期)의 수군 명장으로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이후 지례부사(知禮部事) 등의 관직을 거쳐 1260년(원종 원년)에 중서시중문화평장사(中書侍中門下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가계]
이천(李仟)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암수(東巖叟)이며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름이 이천(李阡)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의 6세손이며 보승별장(保勝別將) 이순(李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중랑장 채충(蔡沖)의 딸이다. 부인은 경주김씨 평장사 김기손(金起孫)의 딸, 중랑장 장인기(張仁起)의 딸이다. 첫째 아들 이자원(李子蒝)은 직문한서(直文翰署)를 지내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추봉(追封)[죽은 뒤에 관위를 내림]되었다. 둘째 아들 이혼(李混)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시호는 문장공(文莊公)이며, 셋째 아들 이자화(李子華)는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냈다.
[활동 사항]
1231년(고종 18)에 시작된 몽골의 침입에 따른 20여 년의 대몽 항쟁에서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으로 강도(江都)를 수호하고 수군을 지휘하여 충청, 전라, 서도 해안의 강화도 보급로를 확보하고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을 수호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1256년(고종 43) 6월 초 몽골 제6차 침입군을 막기 위하여 수군 200여 명을 통솔하여 6월 23일 온수현(溫水縣)[현 충청남도 아산시]에 상륙해 몽골군을 기습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충청 해안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약탈하는 적군 수십 명을 섬멸하고 사로잡힌 우리 양민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하였다. 온수현 연안은 평야가 발달한 곡창 지대로 강화도와 뱃길로 통하는 아주 가까운 중요 항쟁 지역이었다. 조정에서 포상으로 은 6근을 내렸는데 이천은 은을 사졸(士卒)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묘소]
이천의 묘소는 실전하여 전의 선영 아래 추원단을 세워 봉전(奉奠)하여 오다가 영사재(永思齋) 재실을 옮겨 세우고 경원사(景遠祠)를 창건하였다. 시조 이도를 주벽으로 모시고 종향(從享)[배향]으로 이천을 봉전하였으며 영사재 아래 노변에 조성한 ‘안산원(案山園)[4위신도비원]’에 이천과 이천의 세 아들의 신도비가 함께 건립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10월 12일 이천의 장의충절(壯義忠節)을 기려 대한민국 해군에서 처음 제작한 국산 잠수함 1호에 이천의 이름을 따 이천함(李仟檻)으로 명명하고 진수하였다. 이천함은 1994년 4월 말 취역하여 우리나라의 해상과 해중을 방위하는 작전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