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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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忠傑 |
영어공식명칭 | Ryu Chunggeol |
이칭/별칭 | 신백,금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588년(선조 21) - 류충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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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광해군 10) - 류충걸 진사시에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인조 14) - 류충걸 사재직감장으로 병자호란 당시 의병모집 |
몰년 시기/일시 | 1665년(현종 6) - 류충걸 사망 |
묘소|단소 | 류충걸 묘소 및 신도비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독골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하산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관직 | 세자익위사익위|사재직감장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
[개설]
류충걸(柳忠傑)[1588~1665]은 류형(柳珩)의 장남으로 자는 신백(藎伯), 호는 금사(錦沙)이다. 광해군 폐모사건을 계기로 혼탁한 조정에 나아가기를 거부한 채 낙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는 어머니 전주이씨의 고향이면서 류충걸의 처 능성구씨 집안의 전장(田莊)이 있던 곳으로 외가·처가의 인연으로 공주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류충걸이 입향한 후 류충걸의 후손들이 대교천을 따라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며 대교천 주변 지역 곳곳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가계]
진주류씨 가계는 류충걸의 아버지인 류형을 비롯하여 류림 등의 무인들을 배출하였다. 류충걸이 세종 지역에 정착한 이후 자신을 비롯하여 후대 류효걸·류신걸·류혁연·류비연·류상량·류상필 등 걸출한 무신들을 배출하였다. 군영대장이 4명, 통제사만 8명이 나왔으니 조선 후기 진주류씨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활동 사항]
류충걸은 성혼(成渾)의 문인이던 능성구씨 구성(具宬)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구성의 사위이기도 하다.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1623년 인조반정 후 비로소 벼슬에 나갔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화의 성립으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류충걸은 척화를 주장하여 존주록(尊周綠)[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이태수가 조선 역대의 존주양이의 정책이념과 군사력 강화책을 정리 한 책]에 들어간 인물이다. 그 뒤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를 거쳐, 현감을 지냈다.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뒤에 설욕책을 상소하였는데, 세자사부로 있던 이유태(李惟泰)가 류충걸의 상소문을 읽고 류충걸의 충의심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류충걸의 넷째 아들인 류병연(柳炳然)이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으로 나아갔으며 후대에는 류충걸을 중심으로 하는 직계 후손들 역시 순조와 헌종 대에 가서는 류상량(柳相亮)과 류상필(柳相弼)이 군영대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류환연과 류담연 등 많은 후손들이 무과 급제자가 되면서 무반 가계(家系)를 더욱 공고히 계승하게 된다.
[묘소]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독골에 류충걸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독골은 국사봉을 뒤로하고 장군봉을 앞에 둔 명당 터라고 전하여진다. 류충걸의 묘역 입구에는 1687년(숙종 13)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은 류지발(柳之發)이 지었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서(篆書)[전서체로 쓴 글씨]로 썼다. 방형 대좌에 빗돌[비석]을 세우고 옥개형 이수(螭首)[비석의 머리]를 올린 형태로 총 높이 184㎝, 폭 71.5㎝, 두께 20㎝의 규모다. 묘역에는 묘비·상석·문인석·동자석·석주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1997년 대교리 독골마을에 건립한 금호재(錦湖齋)에서 매년 제의를 올리고 있다.
[상훈과 추모]
류충걸은 금호서사에 배향(配享)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