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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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珩 |
영어공식명칭 | Ryu Hyeong |
이칭/별칭 | 사온,석담,충경,진충보국,병자호란,이순신,충렬사,무반 가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566년(명종 21) - 류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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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선조 25) - 류형 선전관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선조 27) - 류형 과거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선조 30) - 류형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료가 되어 활약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광해군 1) - 류형 함경도병마절도사 겸 회령부사 |
몰년 시기/일시 | 1615년(광해군 7) - 류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27년(순조 27) - 금호서사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72년 - 충렬사 건립 |
묘소|단소 | 류형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698 |
사당|배향지 | 충렬사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하산 |
사당|배향지 | 충경공 류형 신도비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 산90-3 충렬사 경내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관직 | 삼도수군통제사|병마절도사 |
[정의]
조선시대 세종 지역 출신으로 삼도수군통제사와 병마절도사 등 고위직을 지낸 무신.
[개설]
류형(柳珩)[1566~1615]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이다. 27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강화에서 활동하다가 선조가 있는 의주 행재소로 가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조의 친유(親諭)[임금이나 군주가 몸소 가르쳐 타이름]를 받고 감격한 나머지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글자를 등에 새겨 스스로 맹세하였다.
이후 해남현감을 비롯하여 부산진 첨절제사, 경상도우수사, 전라우수사, 통제사, 사헌부감찰, 평안도절도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가계]
류형의 할아버지는 류진동(柳辰同), 아버지는 경원부사 류용(柳溶)이다.
류형은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서 류충걸·류효걸·류신걸 아들 셋을 두고 양천허씨(陽川許氏)와의 사이에서 류예걸·류제걸·류지걸·류의걸 네 아들을 두었다.
후일 류형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무반 집안으로서 진주류씨 가계(家系)[대대로 이어 내려온 한 집안의 계통]가 탄생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 문무과에서 혼재되어 인물이 배출되다가 류형의 아들 대에서부터 무과 급제자를 비롯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진주류씨는 18~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무반 가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과거급제 등을 통하여 무반직을 계승함은 물론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후기 무반 가문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활동 사항]
류형은 1592년(선조 25)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幕僚)[조선시대에 감사·유수·병사·수사·견외 사신으로 따라다니면서 일을 돕던 무관 벼슬]가 되어 수군 재건에 노력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남해 앞바다 전투에서 곤경에 처한 이순신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류형은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충청도병마절도사, 함경도병마절도사로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그밖에도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 등 많은 무관직을 역임하였고,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특히 류형은 용병(用兵)에 능하였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 확립에 주력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묘소]
진주류씨 세거지는 원래 경기도 고양 지역이며, 류형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698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류형의 위패는 전라남도 해남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충경(忠景)이다.
충경공 류형 신도비는 본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능곡 번덕동에 있던 것인데 충렬사를 건립하면서 1973년 세종 지역으로 옮겨 세웠다.
신도비의 비문은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篆)을 하였다.
1874년 정학교(丁學敎)가 다시 쓰고 이남식(李南軾)이 전(篆)하여 개립(改立)[탑이나 기념물 따위를 고쳐 세우거나 다시 세움]하였다.
충경공 류형 신도비는 2017년 4월 2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경내 충경공 류형 신도비 옆에 세워져 있는 충렬비는 1976년에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글을 써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