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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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光山金氏旌閭 |
이칭/별칭 | 열녀 박기정 처 광산김씨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산45-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952년 - 열녀 광산김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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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5년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7~1968년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0년대 말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2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2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2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열녀 광산김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산45-1 |
원소재지 | 열녀 광산김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산45-1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무안박씨 문중 |
관리자 | 무안박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2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에 있는 박기정의 처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개설]
열녀 광산김씨 정려는 박기정(朴基鼎)[1792~1830]의 처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광산김씨는 광성군 김국광의 후손인 김구택(金龜澤)의 딸로, 무안박씨 가문으로 출가하였다.
광산김씨가 혼례를 치른 사흘 후 뜻밖에도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광산김씨는 남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 봉양하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광산김씨는 3년간 시묘에 정성을 다하고 수절하면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고, 충청도 당진 사기소리에 사는 먼 친척 아이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위치]
연동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응암리 노곡마을이 있다. 열녀 광산김씨 정려는 노곡마을 안쪽 낮은 구릉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열녀 광산김씨 정려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남편에게 먹여 병을 고치고자 한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연기 지역에 행차한 충청도 관찰사가 광산김씨의 열행을 듣고 나라에 보고하여 1877년(고종 14)에 명정을 받았다.
정려기는 1877년 명정을 받을 당시 우의정 송근수(宋近洙)[1818~1903]가 짓고 민영태(閔泳泰)가 썼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정려 건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정현판만 종가의 대문에 걸어 두었고, 그 후에는 종가의 사랑채 들마루에 걸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려가 건립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중 1944년에 신기하게도 돌 무더기가 한 달가량이나 계속 떨어지는 이변이 일어나자 집안에서 돈을 내어 100일간 경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기화로 삼아 광산김씨의 현손 박용래 등이 1952년 4월에 정려를 건립하였다.
1965년에는 청기와로 지붕을 단장하였고, 2~3년 후 기와를 새로 올렸다. 1980년대 말에 군의 보조를 받아 정려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현재의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8각 고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정려의 4면은 홍살로 처리하였고, 창방 위에는 2개의 화반대공을 놓았다. 정려 주변에는 낮은 철책을 돌렸다.
[현황]
정려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1877년(고종 14)에 열녀 명정을 받은 선비 박기정의 처 광산김씨의 정려임을 기록한 명정현판[烈女 士人朴基鼎妻 孺人光山金氏之閭 崇禎後五 聖上十三年丙子十一月 日 命旌, 171×35㎝]이 걸려 있다.
또한 중앙에 세워진 비석[비신 140×41.5×30㎝]은 1900년에 세운 것으로, 화강암 대좌 위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비석의 전면에는 ‘烈女 士人務安朴基鼎妻 光山金氏之閭’라고 새겨져 있고, 나머지 3면에는 1950년에 성기운(成璣運)이 추기(追記)하고 병서한 정려기가 음각되어 있다.
열녀 광산김씨의 묘소는 정려가 세워진 연동면 응암리의 산 정상부에 있다. 열녀 광산김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열녀 광산김씨 정려는 시집간 지 얼마되지 않아 병든 남편을 위하여 제 살을 베어 가며 봉양한 광산김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명정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특히 명정을 받은 후 바로 정려를 건립하지 않고 명정현판만 만들어 종가의 대문에 게재한 것은 조선시대 정려 건립의 한 양상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