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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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牧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우인수 |
[정의]
조선 시대 성주목을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개국 당시 성주는 경상도에서 가장 넓은 간전 결수(墾田結數)[간전은 개간하여 만든 밭]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로 상주, 진주와 함께 경상우도의 중심된 큰 고을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 경산부(京山府)로 있다가 1413년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됨에 따라 성주목사(星州牧使)가 파견되었다. 성주 지역은 조선 전기에 왕자들의 태실(胎室)과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시된 고을이었다.
[담당 직무]
목사(牧使)는 관찰사 밑에서 각 목을 다스리던 정삼품 동반 외관직으로, 성주목사는 성주의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 관료로서 국왕을 대신한 수령으로서의 통상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평균 2년에 한 번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관련 기록]
성주목사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조선 시대 정사류의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성주읍지(星州邑誌)』 등의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역대 성주목사를 역임한 인물은 『성주군지(星州郡誌)』에 소개되어 있다.
[변천]
1413년(태종 13)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加利縣)·팔거현(八莒縣)·화원현(花園縣)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광해군 대의 이창록(李昌祿) 사건이나 인조 대에 박흔(朴訢)이 연루된 모역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목으로 환원되는 등 부침이 몇 차례 있었다. 성주는 경상도에서 가장 넓은 농지를 보유하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의 팔거현[현재 칠곡]에 설치되는 등 행정적·군사적으로 중시된 곳이었다.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은 학자를 위시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된 영남의 거읍이었다.
조선 후기 1640년(인조 18) 팔거현은 신설된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1684년(숙종 10) 대구부(大丘府)로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목사를 위시한 수령은 직속 상관인 감사에 의해 출척되고 중앙의 대간으로부터 감찰과 탄핵을 받는가 하면 군사상에 있어서는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기도 했으나 실질적으로 군현 통치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졌다. 수령의 법정 임기를 채운 자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임기 중에 교체되거나 파면 또는 사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주목사는 주로 문과 출신의 문관이 임명되었다. 재임 시 선정을 베푼 것으로 『성산지(星山誌)』에 소개되어 있는 성주목사 몇 사람의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545년(인종 1)에 부임한 남궁숙(南宮淑)은 힘을 다하여 정치를 하였으며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데 뜻을 두었다. 이윤경(李潤慶)은 1546년(명종 1)에 자청하여 성주목사로 부임한 경우인데, 정성을 다하고 진실된 정사를 펼치니 선비와 백성들이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그 다음에 목사로 온 이는 조희(曺禧)였는데, 은혜로운 정치가 없었다. 남궁숙과 이윤경이 연이어 와서 선정을 베푼 데 비해 그 뒤를 이어 평범한 이가 부임한 것이다. 성주의 어떤 사람이 역(驛)의 벽에 다음과 같이 적어서 풍자하였다. “천상남궁자(天上南宮子)[하늘 위의 남궁 목사] 운간이사군(雲間李使君)[구름 사이의 이 목사] 조교장구척(曺交長九尺)[교대로 온 조 목사 키가 구척이니] 우열숙능분(優劣孰能分)[우열을 누가 능히 가릴까]”
노경린(盧慶麟)은 1555년(명종 10)에 부임하여 일에 임하는 것이 정밀하고 분명하였으며, 많은 일들을 다 처리해 내니 정사가 이루어지고 업무가 간편해졌다. 선비를 장려하고 학문을 권장하였는데, 1558년에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창건하여 선비들이 머무르며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서원의 학사(學舍)에서 공부하고 시험을 보는 것을 진도와 규정에 따라 하도록 하니 문풍이 크게 떨쳐졌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게 되자, 귀천을 막론하고 고을의 백성들이 모여 전송하였다.
황준량(黃俊良)은 1560년(명종 15)에 부임하여 전 목사 노경린이 창건한 영봉서원을 더욱 확장하고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또 문묘를 중수하여 예전의 규모보다 넓혔다. 마침 오건(吳健)이 교수로 있었는데 서로 뜻이 맞아 학생들을 가려 모집하여 네 등급으로 나누어 오건으로 하여금 교육을 주관하게 하였다. 또 공곡서당(孔谷書堂)과 녹봉정사(鹿峯精舍)를 창건하여 다방면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제말(諸沫)은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승진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계획을 세워 잘 싸우다가 오래지 않아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승 남구만(南九萬)은 ‘문득 일어나 적을 토벌하니 향하는 곳마다 상대가 없었다’ 하였고, 판윤 유최기(兪最基)는 ‘싸울 때마다 용기가 불끈 솟아 수염과 머리털이 귀신과 같았다’ 하였다.
오도일(吳道一)은 1692년(숙종 18)에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켰다. 한덕필(韓德弼)은 1738년(영조 14)에 와서 2년 동안 흉년을 당한 백성을 구휼하니 온 고을이 이로 인해 안정되었으며, 군기와 의장을 정비하고 개조하였다. 사직하고 돌아갈 때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으며, 40개 면(面)에서 각각 송덕비를 세웠다. 정기락(鄭基洛)은 1862년(철종 13) 임술농민항쟁이 있고 난 뒤에 부임하여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며 민심을 진압하였다. 관용 회계가 하나도 명목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청백리의 풍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