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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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邑城 |
영어공식명칭 | Seongjueupseong Walled Tow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예산리|백전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 성주읍성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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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9년 6월 8일~2009년 9월 16일 - 성주읍성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구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서쪽 성벽 발굴 조사 실시 |
훼손 시기/일시 | 1894년 - 성주읍성 동문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20년 - 성주읍성 석성으로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91년 - 성주읍성 재정비 |
현 소재지 | 성주읍성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
현 소재지 | 성주읍성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
현 소재지 | 성주읍성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 |
성격 | 읍성 |
양식 | 평산성 |
크기(높이,길이,둘레) | 약 2.05㎞[둘레]|약 2.7m[높이]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예산리·백전리에 있는 고려 후기 읍성.
[건립 경위]
성주읍성(星州邑城)의 처음 축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기록에 따르면 1380년(우왕 6)에 토성이었던 것을 1520년(중종 15)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방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는데, 이때 성주읍성도 재정비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전란을 겪은 후 큰 피해를 겪어 건립과 소실을 반복하다가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혁명(東學農民革命) 때 동문이 소실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성주읍성도 훼손, 소실되었다.
[위치]
성주읍성은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와 예산리·백전리를 포함한 성주군의 중심지 일대에 있다. 북쪽으로 4㎞ 떨어져 있는 성주군 초전면의 인현산(印懸山)[해발 185m]을 진산(鎭山)으로, 남동쪽으로 3㎞ 떨어져 있는 성산(星山)[해발 383.4m]을 안산으로 삼아 나즈막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내에 성주읍성이 설치되었다.
[형태]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를 중심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평산성으로, 조선 시대의 고지도에서 보이는 모습은 원형 또는 타원형의 형태를 띤다. 『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에는 ‘읍성의 둘레가 6,755척[약 2.05㎞]’ 정도로 기술되어 있다. 높이는 2.7m로 추정한다. 읍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을 비롯하여 성내에 객사와 동헌(東軒), 아사(衙舍) 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경산지(京山志)』에는 동·서·북 3문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산지(星山誌)』와 『성주목읍지』에는 4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이후에 남문이 추가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2002년에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성주읍성에 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09년 6월 8일~2009년 9월 16일에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구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성주읍성 서쪽 성벽에 관한 발굴 조사를 수행하였다. 성주읍성은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 개설 및 시가지 확장으로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데, 조선 후기 고지도와 읍지를 통해 그 규모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근래에 성주군의 역사 테마 공원 조성 사업에 따라 조선 전기 4대 사고의 하나인 ‘성주사고(星州史庫)’와 조선 시대 전통 연못인 ‘쌍도정’ 및 성주읍성의 북문과 성벽이 재현·정비되었다.
[의의와 평가]
성주읍성의 성곽 규모와 모습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일부 시행된 문화재 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규모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주읍성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관련 연구자들의 학술 조사와 더불어 체계적인 종합 정비 기본 계획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