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48
한자 星州牧-再現-星州歷史-公園
영어공식명칭 Reproduce Seongjumok, Seongju History Theme Park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5길 37-1[예산리 51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곽명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0년 - 성주읍성 토성으로 축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20년 - 성주읍성 목사 김우 석성으로 개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1년 - 성주읍성 성문 건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2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기본 계획 완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2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투자 심사 승인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12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문화재 시굴 조사 완료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6년 12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기본 및 실시 설계 용역 발주 및 착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6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1차[성주읍성~북문] 공사 발주 및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8년 5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2차[성주읍성~체성] 공사 발주 및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9년 3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1차[성주읍성~북문] 공사 준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9년 5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3차[성주사고 및 쌍도정] 공사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0년 6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전체 공사 준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0년 6월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주변 정비 공사 발주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0년 10월 31일 -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준공식 개최
관련 지역 성주 역사 테마 공원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주읍5길 37-1[예산리 516]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의 중심지이며 역사적으로 읍치의 상징인 성주읍성을 재현한 공간.

[개설]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은 과거에 성주읍성(星州邑城)이 있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번지[성주읍5길 37-1] 일원에 성주읍성을 재현하고 주변 공간을 정비하여 도심 공원으로 만든 공간이다. 성주의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여 성주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성주읍성은 고을을 지키기 위해 고려 시대인 1380년(우왕 6)에 처음 쌓은 것으로 주민을 보호하는 군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함께 수행한 성이었다. 처음에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 시대인 1520년(중종 15)에 성주목사(星州牧使) 김우(金祐)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선조 24년)에 성문(城門)이 건설되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새마을 운동 등 사회 변혁기를 거치면서 성벽과 성 안팎에 있던 역사적 시설물과 건축물 등은 대부분 사라졌다. 2011년 성주여자중학교·성주여자고등학교 진입로 확장 공사를 위해 일부 구간을 시굴한 결과 기존에 석성으로 추정하던 구간에서 토성 구조가 확인되었다. 그것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유구(遺構)이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주변에 서문 고개, 서문밖 숲[성밖숲], 잣밖[城外] 같은 과거에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지명이 일부 남아 있다.

2015년 12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기본 계획을 완료하였고, 투자 심사를 승인하였으며, 문화재 시굴 조사를 완료하였다. 2016년 12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기본 및 실시 설계 용역을 발주하고 착수하였다. 2017년 6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1차[성주읍성~북문] 공사를 발주하고 착공하였다. 2018년 5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2차[성주읍성~체성] 공사를 발주하고 착공하였다. 2019년 3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1차[성주읍성~북문] 공사를 준공하였다. 2019년 5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3차[성주사고 및 쌍도정] 공사를 착공하였다. 2020년 6월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전체 공사를 준공하였고 주변 정비 공사를 발주하였다. 2020년 10월 31일 성주 역사 테마 공원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위치와 입지 조건]

고려 때 내륙의 중요한 대도시와 주요 교통 요지에 성을 많이 쌓았다. 왜구가 내륙까지 침입해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읍성은 보호와 방어를 주목적으로 축성하였기에 지형적으로 그 목적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곳에 조성하였다. 성주읍성도 1380년에 고을의 주민을 보호하는 군사 기능과 행정 기능을 함께할 수 있는 지형에 축조되었다.

성주읍성은 현재 성주읍의 중심부인 경산리·예산리·성산리·백전리 일부를 아우르는 곳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읍성은 북쪽의 인현산(印懸山)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남동쪽에 위치한 성산(星山)을 안산(案山)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산이 안산보다 낮고, 주위는 해발 100m 전후의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북서쪽에서 유입되는 이천(伊川)성주읍성 남쪽을 돌아 동북쪽으로 흘러가면서 해자(垓字) 역할을 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로 적당한 곳이다.

[과거 성주읍성의 규모와 시설물]

성주읍성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조선 시대 경상도 서남 지방의 대읍성에 속한다. 『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에 따르면 성주읍성의 규모는 둘레 6,755척으로 약 2.1㎞에 달하고, 고지도와 최근의 지표 조사 보고서 등에 따르면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80년에 처음 축성될 당시의 토성 둘레는 4,502척[1.45㎞]이고 높이는 13척[약 3.9m]이다. 1520년에 성주목사 김우가 석성으로 개축하였을 당시 성의 둘레는 6,755척[2.1㎞]이고 높이는 9척[약 2.7m]이다. 해자(垓字) 둘레는 7,550척[2.4㎞], 너비는 7척[약 2.1m], 깊이는 5척[약 1.5m]이다. 성문은 동문·서문·북문의 3문이었다가 후에 남문을 추가하여 4문이 되었다.

건축물은 『성산지(星山誌)』, 『경산지(京山志)』, 『성주읍기도(星州邑基圖)』 등의 기록에 의하면 전형적으로 조선 시대 읍성 건물과 시설물이 배치되었다. 공간적으로는 성안과 성 밖에 산재해 있었으며 향리들의 업무 공간인 행정 시설, 향내 사족 관련 시설, 기념물 및 사우(祠宇), 기타 시설로 나뉜다. 19세기 말에 작성된 『성주읍기도』를 통해 시설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행정 시설은 목사의 생활 공간인 내동헌(內東軒), 목사의 집무 공간인 외동헌(外東軒)이 있었으며 편액은 ‘청민당(聽民堂)’이다. 망궐숙배(望闕肅拜)와 영빈관(迎賓館)으로 쓰인 객사(客舍), 객사에 딸린 부속 건물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통인(通引)·책실(冊室)의 근무처인 매죽당책실(梅竹堂冊室), 목사의 안 살림집인 내아(內衙), 내동헌의 정자로 추정되는 사시헌(四時軒)이 있었다. 관원과 향리들의 시설 공간을 보면 관원들이 근무하는 곳인 관청(官廳), 향리들의 근무처인 작청(作廳), 호장(戶長)의 근무처이면서 관인을 보관하는 주사(州司)가 있었다.

형방(刑房)의 근무처인 추소(秋所), 형을 집행하는 하리(下吏)의 근무소인 군뢰방(軍牢房), 장교들의 근무처인 장교청(將校廳), 장교 밑에 사역된 하리들인 사령의 근무처인 사령청(使令廳), 별포군의 근무처인 별포청(別砲廳), 군장관(軍將官)들의 집무소인 장관청(將官廳), 무기 창고인 군기고(軍器庫), 군기고를 관리하는 직숙자의 방인 군기직방(軍器直房), 하리 중의 일직 근무자가 근무하는 곳인 수직청(守直廳)이 있었다. 세금과 관련하여 전세(田稅)를 부과하는 전제소(田制所)와 전세를 받아들이는 곳인 수조소(收租所)가 있었다. 관노들의 근무처인 관노방(官奴房), 밥하는 곳인 증반소(蒸飯所), 부채를 만드는 공인(貢人)들이 근무하는 곳인 선자방(扇子房), 책을 제본하고 공문서를 관장하는 책공들의 근무처인 책공청(冊工廳)이 있었다. 외동헌의 바깥 정문의 문루지만 통행하지 않는 폐문루(閉門樓)가 있었다.

둘째, 향내 사족 관련 시설로는 사족의 집회소로 추정되는 회로당(會老堂), 좌수·별감 등 현임 향임들의 근무처인 향청(鄕廳), 생원·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사족들의 집회소인 연계소(蓮桂所)가 있었다.

셋째, 기념물 및 사우로는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인 이능일(李能一)을 성황신으로 모신 성황당(城隍堂), 성황당 내 뒤쪽에 있던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는 사(舍),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농서군공비각(隴西郡公碑閣),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을 세운 제말(諸沫)[1552~1593]을 기리는 제말장군비각(諸沫將軍碑閣),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의 한 사람인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몽와비각(夢窩碑閣), 관우(關羽)를 제향하는 무안왕묘(武安王廟)가 있었다.

넷째, 기타 시설로는 성주의 주산으로 추정되는 곳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명명(命名)한 것으로 여겨지는 청송대(聽松臺), 성주읍의 동문인 벽청문(闢靑門), 객사에 딸린 연못 두 곳, 연못 옆에 낮은 언덕으로 과거 유배된 사람이 머문 가옥인 독산(獨山), 고령으로 나가는 서쪽의 큰 길인 서대로(西大路), 읍내의 주도로인 종로(鐘路), 고령으로 가는 다리인 고령통교(高靈通橋), 대구로 가는 다리인 대구통교(大丘通橋)가 있었다.

[현재의 모습]

성주읍성은 역사의 부침에 대부분 사라졌지만 옛 문헌을 기반으로 하여 성주군에서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다. 그 결과로 성주읍성의 전체적인 위치를 파악하였으며 전체에서 일부분인 북쪽 부분을 재현하여 성주가 경상도의 큰 고을이던 그 위용을 느낄 수 있는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을 2020년에 완공하였다. 현재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의 총 부지 면적은 3만 6807㎡이며, 신축한 건축물 면적은 총 285.349㎡이다. 성벽과 성지문(星智門), 성문 누각인 민락루(民樂樓), 쌍도정(雙島亭), 실록각(實錄閣) 등 주요 구조물과 건축물을 다시 지었다.

재현된 성주읍성을 중심으로 주변과 도심지에 많은 역사적 유적이 있다. 성주읍성 남쪽에는 조선 왕조의 기록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실록을 보관하던 실록각 즉 사고(史庫)를 재현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사대사고(四代史庫)의 하나로 1439년(세종 21)에 성주사고(星州史庫)를 신설하여 실록을 봉안하던 곳이다.

성문에 걸맞게 웅장하게 잘 지은 북문은 성지문이며, 문루(門樓)는 민락루라 이름을 붙였다. 성지문은 유학에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네 가지의 성품으로 여겨지는 사단(四端)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북(北)을 상징하는 지(智)를 붙인 것이고 성(星)은 당연히 성주를 지칭한다. 성문 천장에는 각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四神) 중 북쪽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를 그려서 그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였다.

성주읍성 북쪽에는 쌍도정을 재현해 놓았다. 쌍도정은 영조 때 관리이자 당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재현해 놓았다. 쌍도정이 원래 있던 곳은 현 관운사(關雲寺) 앞 묘목장 또는 그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 경사지 산책길 옆에는 여러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이전에는 성주향교(星州鄕校) 인근 도로변에 있었으나 교량 개체 공사로 잠시 다른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이 조성되면서 옮겨 세운 것이다. 비석 중에 특이할 만한 것은 성산기공비(星山紀功碑)로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1728]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내력과 이에 공을 세운 성주목사 이보혁(李普爀)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이름을 새기고 기념한 것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일어났다 하여 성산기공비무신기공비(戊申紀功碑)라 부르기도 한다.

인근에는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회합 장소인 사마소(司馬所)의 후신인 연계소 건물의 일부인 연계당(蓮桂堂)이 남아 있다. 또한 성주를 대표하는 성씨인 성주 이씨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봉산재(鳳山齋)와 앞마당에 조성한 성주 이씨 시비 공원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성산 이씨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성산재(星山齋)가 있다.

인물과 관련된 장소로 1983년 버마 아웅 산 테러로 순국한 서석준(徐錫俊) 장관의 생가를 최근 새롭게 꾸민 청사 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노론 사대신의 하나로 성주로 귀양 와 죽은 몽와 김창집을 기리는 김창집 수명유허비(金昌集受命遺墟碑)가 있다. 성주 시외버스 터미널 인근에 조선 시대 유배지로 추정되는 독섬[독산]이 있으며 현재 경로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 도로 건너에 눈에 띄는 2층으로 된 특이한 목조 건물이 있다. 성주 예산리 만산댁(星州禮山里晩山宅)성주 예산리 배리댁(星州禮山里裵里宅)이다. 이 두 건물은 한옥 형태의 2층 가옥으로는 경상북도에서 유일한 사례로 한국 주거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다. 성주 예산리 만산댁을 지은 도문환(都文煥)[1887~1970]은 만산(晩山) 도갑모(都甲模)[1864~1937]의 아들이다. 도갑모는 선각적인 유림으로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1920년대 성주 지역의 청년 운동과 신간회(新幹會) 운동 등 여러 사회 운동을 주도하여 지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에서 서북쪽에 주변 택지 조성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매장 풍습을 확인할 수 있는 원삼국 시대의 무덤이 나왔으며, 현재 장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곳에서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희귀한 우각형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가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의 미래]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은 낮에 보는 모습도 멋지지만 야간 조명 시설이 되어 있어 특히 야간 경관이 뛰어나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연극, 음악회, 결혼식 등 다양한 문화·공연 행사가 펼쳐지고 있어 문화 여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성주 역사 테마 공원은 성주의 역사와 함께 군민들의 휴식·문화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될 수 있는 가치를 많이 지니고 있다. 앞으로 성주의 새로운 랜드마크(landmark)로 자리매김하여 성주 경산리 성밖숲과 더불어 성주의 도심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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