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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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言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중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
[개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은 성남 지역의 지명과 관계가 있는데, 일설에 조선 후기의 문신 이집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이라고 한데 대하여, 송언신의 서원이 있었던 지역을 상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과우(寡尤). 호는 호봉(壺峰). 병조참판 송수(宋壽)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양천현령 송말경(宋末璟), 아버지는 부사 송율(宋嵂)이다. 어머니는 좌참찬 신시복(愼時復)의 딸이다. 선조가 직접 써서 송언신에게 남모르게 보낸 서찰 7건이 있는데, 이 중 ‘만력십삼년십이월십팔일예조입안(萬曆十三年十二月十八日禮曹立案)’은 송언신에게 자식이 없어 10촌 형에게서 자식을 입양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문서이다. 그렇게 입양한 아들이 송준(宋駿)이다.
[활동사항]
156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과 정언, 정랑, 헌납 등을 역임하고, 1586년 호남에 순무어사로 파견된 뒤 부수찬을 거쳐 전적, 수찬, 장령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젊어서는 언관으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고,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立)과 연루되어 부교리에서 면직되었다. 그 뒤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592년에 삭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조참판이 되어 평안도 순찰사·함경도 순찰사를 겸하면서 군병 모집에 힘썼다. 1596년 동면순검사로 다시 등용된 뒤 대사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불교를 배척하여 승려 보우(普雨)를 죽일 것을 건의하였으며, 동면순검사로 있을 때는 인력이 부족한 겨울철에 성벽에 물을 부어 얼리는 계책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여러 번 간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1602년 이조참판으로서 자헌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병조판서, 좌참찬, 세자좌빈객 등을 거쳐 1604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고 선무훈에 책록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6년 정헌대부에 올라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두 번 지내고 정승에 뽑혔다. 선조가 승하하자 광주의 반곡(盤谷)에 은둔하였다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성학지남(聖學指南)』과 『호봉실기(壺峯實記)』가 있다.
[묘소]
송언신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고, 영정은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심석리에 있는 영정각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