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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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陽洪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고 임진왜란 후 입향한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개설]
서산 지역 남양 홍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서산군 인물조에 홍운해(洪雲海) 아들 홍성원(洪性源), 홍지원(洪智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형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광해군 대에 사마 급제한 이들로 사마방목에는 거주지가 서울로 표기되어 있으나, 서산군의 읍지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산과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활동 시기로 보아 남양 홍씨는 이미 1600년대 초 서산에 터를 잡고 있었을 것이지만 『호산록(湖山錄)』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유력한 성씨는 아니었던 듯 싶다.
남양 홍씨와 관련된 기록으로 주목되는 것은 다음의 『영조실록(英祖實錄)』 1758년(영조 34) 12월 5일조 기사이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 해미현감(海美縣監) 이택(李澤)은 술을 금지하는 것을 빙자하여 때를 틈타서 사리(私利)를 추구하는데, 빈민(貧民)이 금법을 범하면, 음형(陰刑)하고 함부로 마구 곤장을 때려서 혹은 목숨이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하며, 부민(富民)이 금법을 범하면, 몰래 돈이나 뇌물을 받고 무죄로 석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산(瑞山) 땅에 홍씨(洪氏) 성을 가진 한 사람의 부자가 금법을 범하니, 그가 영장(營將)을 겸임하고 있는 연고를 가지고 고을 경계를 넘어가서 붙잡아 와서, 몰래 1백여 냥의 금화를 받고 대략 형벌하는 척 곤장을 때리고 나서 이를 석방하였습니다. …… 마땅히 명하셔서 이들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엄하게 처분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구초(口招)를 받은 뒤에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였다. 즉, 홍씨는 이미 1758년 이전부터 서산에서 크게 세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원]
남양 홍씨의 선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 영류왕[618~642] 때 중국 당나라에서 팔학사의 일원으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펴다가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신라로 피신하였다. 선덕여왕 재위 시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백(唐城伯)[당성은 남양의 옛 이름]에 봉해졌고, 신무왕 때는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되었다. 이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되면서 후손들이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홍은열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입향 경위]
남양 홍씨는 서산 지역에 임진왜란 이후 입향한 성씨로 알려져 있다. 『여지도서』에 등재된 홍성원, 홍지원은 1600년대 초의 인물이므로 이 무렵 서산에 터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남양 홍씨는 현재 서산과 가까운 당진 석문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홍종학의 처 창원 황씨의 명정 현판이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의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다. 이 열녀 정려는 해미, 홍주, 덕산, 부여, 청양, 보령, 결성 등지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1904년에 명정된 것이다. 본래는 시집인 당진군 석문면 삼봉리에 있었으나, 후손이 서산시로 이거하면서 함께 옮겨졌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