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01 |
---|---|
한자 | 瑞山宋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송문익(宋文翊)을 시조와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개설]
서산 송씨는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진 송문익을 시조로 하며, 봉해진 지역을 관향으로 삼고 후손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편찬된 각종 읍지류의 서산군 성씨조에 송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에 의하면 당시에 이미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여 외손이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서산시 내에서 동족 마을을 찾기는 어렵다.
[연원]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에는 당나라 사람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송유익(宋惟翊)은 여산 송씨, 둘째인 송천익(宋天翊)은 은진 송씨, 셋째 송문익은 서산 송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송문익은 고려 충렬왕 대에 서산군에 봉해졌고, 그 후손들이 서산을 관향으로 삼아 대를 이어오게 되었다.
[입향 경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서산군 성씨조에는 송씨가 서산의 토성 중 서령 유씨에 이어 둘째로 등재되어 있으며, 『호산록』에는 첫째로 기록되어 당시 송씨의 위상을 보여 준다. 시조 송문익이 서산군에 봉해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미 고려 충렬왕 대부터 서산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입향의 경위를 알만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현황]
서산 송씨는 『호산록』이 발간되던 1600년대까지도 서산 지역 성씨 중 상위에 드는 성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송씨의 초기 활동 모습은 인물조 등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으므로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호산록』에는 훈도 송계령(宋桂齡)에 관한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향교의 관리에 책임이 있던 20여 명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오직 송계령만이 항상 향교를 지켰으며, 매달 삭망(朔望)[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는 제향하고 명륜당 앞에 괴목[회화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때 그가 심은 나무는 당시 교생들이 타고 온 말을 매어서 시들어 죽었다고 한다. 또 광주목사(廣州牧使) 송효명(宋孝命)과 그의 아들 생원 송유미(宋惟微)의 집이 동분에 있었는데 자손이 없었으며, 외손 이유직(李惟直)과 황위(黃瑋)가 살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에 의하면 송씨는 서산의 유력 재지 사족으로 사위는 변성군 이계연(李繼連)이고 입향 8병사를 배출하는 등 번성하였지만, 아마도 후손이 번성하지 못한 이유 등으로 가문이 절연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시대 문·무과, 생원진사시, 역과 등에 급제한 인물 중 확인되는 서산 송씨가의 인물은 6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들의 거주지가 모두 서산이 아닌 것으로 보아, 1700년대 이후 서산 송씨는 이미 서산 지역이 아닌 타지로 확산·이거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