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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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孝胤 |
영어음역 | Gang Hyoyun |
이칭/별칭 | 선술(善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춘진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임진왜란에 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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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강효윤 졸 |
거주|이주지 | 덕천촌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 |
외가|처가 | 덕천촌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 |
부임|활동지 | 영산현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서산 |
대표 관직 | 영산현감 |
[정의]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서산. 자는 선술(善述). 아버지는 진사 강몽서(姜夢瑞)이다. 아들은 집의(執義)를 지낸 강수이다. 강씨는 서산의 토성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기록이 많지 않아 추적이 어렵다. 1619년 편찬된 서산의 사찬 읍지 『호산록(湖山錄)』에서는 강흡(姜洽)이 향임을 맡아 고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였다고 하니 그가 강효윤(姜孝胤)의 조상일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조선 후기 서산에 세거한 강씨들은 진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다. 강효윤의 딸은 서산 세거 사족인 한효순(韓孝純)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강효윤은 덕천촌[현 서산시 성연면 예덕리]에 살았으며, 천성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주변 사람들과 잘 교유했다고 한다. 강효윤에 대한 기록은 『호산록』에 상세하며 이 기록이 1927년 『서산군지』에 그대로 인용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수록한다.
강효윤이 영산현감에 부임했을 때 임진왜란으로 적이 쳐들어와 영산 또한 성이 함락되었다. 강효윤이 마침 이때에 원수의 명으로 성 밖에 나와 있었는데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잔병과 권졸을 데리고 산중으로 피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을 만나 강효윤이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지키는 신하로서 적을 죽이지 못했으니 비록 살아 있다 해도 고개를 들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마음에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큰 집이 장차 기울려 하는데 한 그루의 나무로는 지탱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몰래 권하였다. 그러나 강효윤이 다시 말하기를 “나도 또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만 평화로운 때에는 임금에게 벼슬을 하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나라를 버리는 것은 신하된 자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마침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잔병 약간을 모집해서 험난한 지역을 점거하고 진을 지어서 많은 적들을 칼로 베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투 중 목숨을 잃으니 그 공이 알려져 예조판서로 증직되었다. 『호산록』에는 한여현(韓汝賢)이 그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