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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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年代農民運動 |
영어공식명칭 | Peasant Movement in the 1920s |
영어의미역 | Peasant Movement in the 1920s |
영어공식명칭 | Peasant Movement in the 1920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덕 |
전개 시기/일시 | 1922년 2월 - 1920년대 농민운동 서면 농민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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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2년 12월 - 1920년대 농민운동 소작인조합운동 시작 |
전개 시기/일시 | 1923년 1월 - 1920년대 농민운동 면단위 농민대회 개최 |
전개 시기/일시 | 1924년 - 1920년대 농민운동 공동경작투쟁, 대지주투쟁 전개 |
전개 시기/일시 | 1924년 - 1920년대 농민운동 조선노농총동맹 결성 참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9년 - 순천농민연합회에서 순천농민조합으로 개칭 |
발생|시작 장소 | 지세반환투쟁 장소 - 전라남도 순천시 쌍암면 |별량면|주암면|낙안면 |
발생|시작 장소 | 서면농민대회 장소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
성격 | 반일운동|농민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순천농민연합회|순천농민조합 |
[정의]
1920년대 전라남도 순천 지역 농민이 일제 식민통치 하의 열악한 정치·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일으킨 반일운동.
[역사적 배경]
토지를 매개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은 토지의 소유를 어떤 문제보다 중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토지 수탈과 식민지 지주제를 축으로 무단농정을 추진했다. 그 결과 다수 농민은 소작인으로 전락해 각종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토지를 상실하거나 토지로부터 이탈되는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에 일제강점기의 농민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반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반일운동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역할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다. 순천 지역의 경우 다수 농민이 거주했고, 이들로 인해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반일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특히 지역의 소작쟁의를 통해 농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농민들의 삶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일제와 식민지 지주의 이중적 수탈로 농촌사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1920년대 문화정치의 공간에서 조선 농민은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당시 소작쟁의는 1919년 3.1운동 이후 농촌사회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삼남지방은 대규모 소작쟁의가 발생한 지역으로, 소작인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대 전반의 경우 전국 소작쟁의의 1/3이 전라남도에서 발생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쟁의가 일어난 곳은 순천 지역이었다. 반면에 1930년대 초는 그 양상이 바뀌면서 순천 지역의 소작쟁의 운동은 그 양상이 변화되었다.
[경과]
1922년 12월 순천 지역에서는 소작인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이유는 혁신청년의 역할 때문이었다. 이들은 농민대회를 주도하면서 소작관계 개선에 주목했다. 1923년 1월이 되어서는 각 면의 농민대회는 리 단위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하는 등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순천농민대회연합회는 소작관계 개선투쟁을 전개하여 지세반환투쟁을 이끌었다, 순천의 쌍암면, 별량면, 주암면, 낙안면 등지에서는 지세반환투쟁이 잘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후 각 면의 농민은 여세를 몰아 소작권이동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24년에는 소작권 이동을 반대한 공동경작투쟁이 활기를 띠었다. 이런 운동의 성과는 1924년 대지주투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제의 대검거가 진행되어 농민대회의 간부가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운동은 이전과 달라졌다. 1925년 1월 순천에서는 22개의 농민단체가 활동했다. 이후에는 순천농민대회연합회가 개입하는 분쟁이 늘어나게 되었다. 실제로 1926년부터는 면단위의 농민대회는 물론이고 순천농민연합회 조차 거의 활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이 위축되었다. 1929년 순천농민연합회는 순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면별 농민대회를 조합의 지부로 개편했다. 하지만 이제 순천농민조합은 의례적인 조합의 일에만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후 농민운동은 보다 지하화되어 갔다. 그리고 순천의 농민조합도 혁명적 조합으로의 개편을 전망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순천 지역의 농민운동은 지역의 운동 가운데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된 반일운동이었다. 순천의 서면에서 농민운동의 효시가 된 1922년 2월 농민대회 이래로 꾸준히 농민대회가 지속되었고, 상당한 효과도 거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면에서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서면이 모래가 섞인 사토(沙土)로 이루어진 농지가 많아서 소출이 적었는데 다른 곳과 같이 높은 소작료가 징수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로 보기도 한다. 서면의 농민대회는 소작료 4할로 인하하고 지세를 지주가 납부할 것을 요구하며 쟁의에 들어갔다. 이후 인접한 군으로 퍼져 전국화되어 갔다. 내용적으로는 ‘공동경작동맹’을 통해 지주들의 탈작 공세에 대응하여 소작인들의 토지 점유의 지속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면서 동시에 교육과 각종 사업을 통해 소작인들의 단결을 고취하고 운동의 의의를 각인하게 하는 장기적인 활동도 벌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과]
순천의 농민운동 세력은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에도 참여했다. 특히 순천농민연합회가 순천노동연합회, 무산자동맹회와 함께 사회주의적 지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순천 지역의 농민운동은 지역의 소작 관련 경제적 모순과 억압의 구조에 대한 민중적 저항으로서 지역민의 의사와 지역사회의 정치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지주와 농민의 구조가 농민운동의 전반을 규정하는 구조는 조금씩이지만 변화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아울러 순천 지역의 1920년대 농민운동은 3.1운동 이후 고양된 의식에 기초하여 전개된 반일 민중운동이었다. 여기에는 3.1운동 이후 전국의 각 지역으로 전파된 민족주의의 영향이 지역 내 식민통치에 대해 반발심을 갖는 농민과 노동자층에 또 다른 자극을 주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