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288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영어의미역 Modern
영어공식명칭 Moder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인덕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근대사회.

[개설]

1860년대를 기점으로 동학의 발생, 흥선대원군 정권의 개혁, 양요(洋擾)와 제국주의의 침략, 여기에 대항한 반침략 민족운동의 발생은 근대사회의 주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개항은 조선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항 시기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의 수립과 세계자본주의의 침투 등 다양한 모습이 한국사회에 나타났다. 이런 구조 속에 동학농민운동과 부르주아적 개혁은 당시 두 가지 형태의 역사적 모습이었다. 당시 한국은 서구세력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또 하나의 시대적 과제였다. 문제는 근대국가 수립이 외세 의존적 구조 속에서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1910년 일본의 침략에 국권이 침탈되었다. 한민족은 일제에 대항해 민족운동을 부단한 펼쳤다. 일제에 의한 통치 속에서 사회구조의 변화와 개인의 인권이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않은 상황은 한민족의 시련이면서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식민지로부터 독립과 해방은 결과적으로 봉건적인 유습(謬習)으로부터 해방도 내포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는 바로 지역의 근대의 내용에 기초하는데, 전라남도 순천의 근대는 바로 보편적 근대의 한 모습뿐 아니라 지역성도 동시에 보였다.

[역사적 배경]

순천의 조선 후기 농촌경제와 사회는 토지가 기본적으로 특권층 소유라는 구조적인 폐단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궁핍한 농민의 구조적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순천 지역에서도 군역의 편중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순천은 아전의 위세가 어느 지역 못지않았다. 반면에 지역의 양반사족의 자기 정리가 잘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순천에서는 환곡에 대한 대안으로 사창제를 순천부사 황익재(黃翼再)가 구상하기도 했다. 이런 구상은 제도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순천 지역에서는 결행했다. 사창제는 향촌의 기능을 보장하는 전제 속에서 시행되어 반상의 차별이 없는 특징이 보인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으로 조선 후기에 순천 지역은 곤궁하지 않았다. 공납물의 경우도 조선 전기에 비해 늘어났다. 동시에 동포제(洞布制)가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빨리 시행되었다. 그리고 포구를 통해 선박이 출항하기도 했는데, 당시 포구는 상품유통의 통로보다는 어업을 위한 공간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장시가 상품유통의 통로였는데, 『동국문헌비고』가 간행된 1770년대에 순천 지역에는 장시 수가 13곳으로 확인된다. 이들 장시는 경제적인 효과와 군사적인 효과를 동시에 반영했다.

1862년(철종 13) 임술봉기가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나 점차 전라도와 충청도로 확산되는데, 순천에서도 1862년 5월 15~17일 동안 일어났다. 부세(賦稅) 문제로 일어난 봉기군은 관아를 습격하고 공전(公田)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들의 봉기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다. 개항 이후 조선 사회는 변화의 급물살을 맞이하는데, 순천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정부의 잡세는 유지되었고, 재정적 자립은 갑오개혁 이후 이루어졌다. 특히 방곡령을 통해 순천에서도 곡물의 유출을 막고자 했다. 문제는 순천의 장시도 일본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무관하지 않은 시기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 이후 한반도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순천 지역은 급변화를 맞이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민증식계획에 순천도 자유스럽지 않았다. 특히 순천에서도 농민의 경우 과소농화(寡少農化)되었을 뿐 아니라 반봉건적인 소작농으로 변화되었다. 1933년의 경우를 보면, 순천의 주민 약 80%는 농업을 본업으로 했고, 농민의 68%는 순소작농이었다. 소작농가가 극빈자의 38%를 차지했다.

순천은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 남원부 소속 순천군이었으나, 1896년이 되어 전라남도 순천군이 되었다. 이후 1908년 낙안군을 폐지하면서 낙안군의 7개 면이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하여, 서면·황전면·월등면·쌍암면·주안면·송광면·상사면·별량면은 그대로 유지되고, 소안면·장평면은 순천면으로, 해촌면·용두면은 해룡면으로, 도리면·하사면·읍내면·내서면은 도사면으로, 동상면·동하면·초하면·초상면은 동초면으로 폐합되기도 했다. 1929년에는 동초면의 5개리를 보성군에 이관하고, 나머지 리는 별량면·낙안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에는 순천면이 순천읍으로 승격되었다. 근대 순천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 도로의 중심지로 경제와 교육, 각종 문화 활동의 중요한 지역 통로였다.

[경과]

순천에는 경찰서·읍사무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구와 순천역 등이 세워졌다. 특히 순천공립농업학교, 매산학교 등 근대교육기관이 순천 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35년 김종익이 토지를 기부해 3년제 도립으로 순천공립농업학교가 세워졌다. 미국남장로회 한국선교회 변요한(邊要翰)[John Fairman Preston, 1875~1975], 고라복[Robert Thronwell Coit, 1878~1932] 목사가 기독 교육을 위해 매산학교를 1910년 10월 설립했다.

이런 조건 아래 근대 순천 지역에서는 지역과 국권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여러 층위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 순천은 근대사회를 위한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동학농민운동 시기의 경우 영호도회소가 중심 공간이었다. 1893년 5월 보은집회에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였는데, 순천의 동학교도 50여 명이 참석했다. 순천의 동학교도는 백산봉기에도 참가한 후 1894년 6월 하순 순창을 거쳐 순천에 돌아오기도 했다. 순천 지역은 영호도회소가 활동을 하면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호도회소의 중심적인 역할은 대접주 김인배가 담당했다. 김인배를 비롯한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순천 관아에 진을 치고 행정력을 발휘했다. 순천에서는 영호도회소가 설치된 이후 약 6개월 동안 또 다른 권력, 동학농민혁명군에 의한 대체 권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순천, 광양의 행정을 접수하고, 낙안, 보성 등지의 관리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영호도회소는 이후 경상남도로도 진출하기도 했다.

의병전쟁 때 순천에서는 먼저 백낙구의 활동에 주목할 수 있다. 백낙구는 광양에서 은거하면서 1906년 10월 의병을 이끌었다. 당시 백낙구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전직 군리(軍吏)였다. 백낙구는 검거 이후 유배를 극복하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097년 전사했다. 본격적인 의병전쟁에는 고광순의 경우가 있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근거로 연곡사에서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킨 다음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다가 순국했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는 회덕 출신의 김동신이 활동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계산에서는 안규홍, 강용언, 강진원, 조규하 등이 활동했다. 다시 순천의 의병부대는 수십 명 단위로 유격투쟁을 주로 전개했다. 반일과 친일세력을 처단한 이들의 활약은 주목된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 순천 지역에서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청년, 농민,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먼저 3.1운동기인 1919년 3월 2일, 순천 지역 3.1운동의 확산은 강영무가 맡았다. 1919년 4월 7일 순천읍 장날 박항래가 읍내 옥천루 부근 연자루 위에서 만세시위를 유도했던 사실은 주목된다. 신기리전평규안용갑, 안응섭과 도란사라는 위친계를 조직하고, 별도로 2.8사를 조직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낙안면 하송리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5월 31일 현재 순천 3.1운동은 집회횟수 6회, 집회원 1,500명, 사망자 8명, 부상자 32명, 피검자는 58명이었다고 한다.

순천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에 활발했다. 그 중심은 순천청년회였다. 물론 한말부터 순천에는 일반 청년회를 비롯해 기독교계의 엡윗청년회, 면려청년회, 신창의법청년회, 불교계의 조선불교청년회 순천송광지회와 선암사 불교청년회 등이 있었다. 순천의 청년단체는 교육 활동, 강연회 및 토론회, 체육대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순천청년회는 순천중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1924년에는 사상대강연회를 열었는데, 박영진이 사회를 보고, 김양수가 연사로 등단해 무산대중운동도 유물사관에 따라 필연적이라는 내용으로 강연을 했다. 순천청년회는 1925년 7월 혁신총회를 통해 계급적 성향을 강화하였다. 1926년 말 청년동맹의 결성으로 청년운동의 방향이 재편되자, 1927년 10월 중순 전남동부청년연맹이 순천청년연맹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순천의 청년운동은 반일적인 부문운동을 강화하는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반일 전선을 주도했다.

순천의 경우 1920년대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농민운동을 보여주었다. 1922년 12월 이후 순천에서는 소작인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1924년에는 대지주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1925년 1월 당시 순천군에서는 22개 농민단체가 활동했다. 그러나 1926년부터는 면 단위의 농민대회는 물론이고 순천농민연합회 활동이 없었다. 1929년 순천농민연합회는 순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농민운동은 점차 지하화되어 갔다. 이처럼 순천 지역의 농민운동은 지역의 부문운동 가운데 오랫동안 진행된 반일운동이었다. 순천의 농민운동 세력은 1924년의 경우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에 참여했다. 특히 순천농민연합회가 순천노동연합회, 무산자동맹회와 함께 사회주의적 지역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농민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운동도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순천은 미국 남장로회가 선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곳 중 하나이다, 호남 지역 선교의 한 중심 공간이 된 순천에는 매산학교가 세워졌고, 이곳이 인재양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매산학교는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에 대항하여 학교의 문을 닫았다. 뿐만 아니라 순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직접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과]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도 국권을 회복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 어떤 이유보다도 여기에는 민족적 역량을 모아 반일투쟁을 전개한 한민족의 힘이 주요했다. 순천 지역에서도 지역의 힘이 근대 순천을 만들어가는 견인차였으며, 그 역량은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의의와 평가]

근대 순천 사회는 한국 근대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라남도 동부의 중심 공간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각종 활동 등의 근거지였다. 근대 순천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순천의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이다. 그 가운데 순천의 역사와 문화는 독자성을 갖고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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