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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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赤色農民組合運動 |
영어의미역 | Red Peasant Association Movement |
이칭/별칭 | 울진적색농민조합,울진농민조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희흥 |
성격 | 사회운동|농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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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33년 3월 29일 |
종결연도/일시 | 1934년 2월 |
발생(시작) 장소 | 울진군 북면 덕구리 |
관련인물/단체 | 윤두현|최학소|남왈성|주맹석|최재소|남석순|남왈기|전봉인 |
[정의]
1933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일어난 농민 운동.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면서 한국의 농민조합운동을 방해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1920년대와는 달리 농민조합운동을 혁명적·비합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여 기존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일제 지주에 대한 농민 폭동 등을 전개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울진에서도 청소년 교육을 통해 농민 운동의 지도자와 담당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울진적색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조합은 농민의 경제적·정치적 의식을 촉진하고 봉건적 착취 제도를 부인한다. 둘째, 본 조합은 전 조선의 농민과 연대하여 본 강령에 의해 투쟁한다.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울진군 안에 산재한 정치적 압박 기관 및 경제적 착취 기관을 박멸하자! 둘째, 봉건주의를 타파하자! 셋째, 미신을 타파하자! 넷째, 일본제국주의 반대!
[발단]
극동공산주의자동맹이 해체된 뒤 사회과학연구회[후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로 개칭]를 조직한 최양술은 1932년 8월 봉화에서 유차을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사회과학연구회를 해체하고, 울진군 농민을 지도하기 위한 울진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였다.
[경과]
1933년 3월 29일 울진군 북면 덕구리 온천여관에서 윤두현, 최학소, 남왈성, 주맹석, 최재소, 남석순, 남왈기, 전봉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기열의 사회로 강원도 최초의 울진적색농민조합 창립총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발기문 초안과 조직론은 1932년 12월 최양술이 이미 작성한 것을 몇 번의 회합을 가진 뒤 진기열이 정리하여 완성하였으며, 1933년 1월에 발기인에게 배부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발기문과 강령 슬로건이 채택되었다.
울진적색농민조합은 혁명적 대중 운동의 방침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강령을 이해하고 비밀을 엄수하는 농민’을 조합원으로 규정하고, 조선에서의 운동 노선이 농민층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주창되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 달성을 울진적색농민조합의 노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울진적색농민조합의 조직은 의장 남왈성, 중앙사무국 진기열[편집부·재정부 겸임], 조직선전부 남왈성, 고용인부 윤두현, 청년부 주맹석, 부인부 최재소, 소년부 최학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먼저 각 마을에 독서회·야학 등을 실시하여 농민층의 계급적 각성을 촉구하고, 청소년의 의식 교양 및 인력 양성에 주력할 것을 결정하였다.
제1회 간부회[1933. 4. 22]에서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고, 일제가 펼치고 있는 농촌 진흥 운동을 이용하여 표면적으로 농촌진흥야학회를 개설하고 울진적색농민조합의 방침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933년 4월 말 청년부 책임자 주맹석은 청년 및 울진제동학교 학생 10여 명을 모아 독서회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주유만이 의식이 불충분한 청소년을 독서회에 가입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하여 독서회 결성은 무산되었다. 같은 해 5월 남왈성, 주맹석, 최학소 등은 울진읍 정림리에서 10여 명을 확보하여 꽃놀이를 가장한 모임을 열고 각 지구별로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각 지구 독서회의 책임자로 울진읍 정림리에 남왈성, 호월리 고원동에 주맹석, 호월리 용제동에 전원강[전범수], 근남면 행곡리에 장호명·최경소, 제동학교 학생반에 남상덕을 각각 선임하고, 해당 지역의 청년 지식인 및 제동학교 학생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들은 『노동독본』, 『사회주의 대의』 등의 좌익 서적을 돌려 읽으면서 사회 운동을 펼쳐 나갈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독서회에서 간간이 조선총독부의 기만적인 농촌 진흥 운동 등에 대한 의식 교육도 행하였다.
농민 대중의 의식을 계몽하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동원 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야학은 울진읍 정림리[남왈성]와 호월리 고원동[주맹석]·용제동[전조현], 북면 나곡리[최학소], 근남면 행곡리 등지에 운영되었다. 이것은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지역 가운데 울진읍 정림리와 호월리는 독서회와 야학의 중심 지역이었으며, 울진 사회 운동의 거점이었다. 조합원들은 확고한 거점을 기반으로 운동의 영향을 주변으로 파급시켜 나갔다.
울진적색농민조합은 교육 운동과 함께 실업 운동도 병행하여 추진하였다. 제3회 간부회[1933. 6. 20]에서는 울진군·삼척군·봉화군 접경 지역에 화전터를 마련하고 실업청년들을 수용하여 양잠지 조성 계획을 세웠으나 조합의 붕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결과]
1934년 2월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울진적색농민조합은 일제 관헌에 노출되어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때 100여 명이 검거되어 50여 명이 송치되었고, 최종적으로 1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울진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은 강원도에서 조직된 최초의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이후 비밀결사 조직인 창유계(暢幽契)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