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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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 of Korea|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1598) |
이칭/별칭 |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조일전쟁(朝日戰爭),임진전쟁(壬辰戰爭),분로쿠 전쟁(文禄の役),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항왜원조(抗倭援朝),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용사지역(龍蛇之役),흑룡지역(黑龍之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 임진왜란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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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592년 7월 8일 - 임진왜란 웅치전투 |
전개 시기/일시 | 1592년 7월 9일 - 임진왜란 안덕원전투 |
전개 시기/일시 | 1592년 8월 경 - 임진왜란 이치전투 |
전개 시기/일시 | 1597년 8월 25일 - 임진왜란 전주성 함락 |
종결 시기/일시 | 1598년 - 임진왜란 종전 |
발생|시작 장소 | 웅치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
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
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 |
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전주시 금상동 |
발생|시작 장소 | 이치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서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의 침략으로 발생한 사건.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1592년 5월 3일에 한양이 함락당하고, 1592년 6월 14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쟁이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임진강에서 작전회의를 갖고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592년 5월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592년 5월 8일경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들은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담당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침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1592년 5월 25일에 임진강에서 남하해 전라도로 향했다. 1592년 6월 중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무주와 금산 방면으로 진격해 전라도를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전라감사 이광(李洸)을 중심으로 해 관군이 수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광은 관군을 동원해서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배치해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전라도의 많은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경과]
1592년 7월 8일에 일본군은 전라도 진안을 거쳐 전라도 완주군 소양면 일대로 침입을 시도했으나, 웅치전투와 안덕원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승리했다. 또한 웅치전투에서 철수한 일본군은 충청도 금산에 주둔하고 있다가 1592년 8월 중순에 다시 이치 지역으로 침입했다. 이때 황진을 비롯한 관군의 활약으로 전라도 지역은 일본군의 침략 없이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1597년 1월과 2월 사이에 일본군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 재차 침략해서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7월 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해 고바야카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이하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 구로다 나가마[黑田長政]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이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경상, 충청, 전라의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체 병력을 동원해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 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적인 열세로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남원에 며칠 머무르다가 전주로 향했으며, 당시 전주를 지키던 전주부윤 박경신(朴慶新)과 수장(守將) 진우충(陳愚衷) 등은 모두 도망갔다. 1597년 8월 25일에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1597년 9월 7일에 우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패배, 남하했고, 좌군도 금구 방면으로 퇴각했다. 1597년 9월 14일에 금구싸움에서 전라도 조방장 원신(元愼)과 김언공(金彦恭)이 승리했다. 이후 일본군은 해안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