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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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德院戰鬪 |
영어공식명칭 | the battle of Ahndukwon |
이칭/별칭 | 소양평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7월 9일 - 안덕원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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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
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전주시 금상동 |
발생|시작 장소 | 안덕원전투 -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이광|황진|이복남 외 |
[정의]
1592년 7월 9일경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소양평[안덕원]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개설]
안덕원(安德院)은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에 있던 원(院)의 하나이다. 동시에 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안덕원마을은 진안 방면에서 완주군 소양면을 지나 전주로 들어오는 초입에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산정동과 금상동 지역에 해당된다. 안덕원마을의 좌측인 북쪽에는 소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우측인 남쪽에는 묵방산[523m]에서 이어지는 산자락이 형성되어 있다. 금상동성당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은 지금은 산자락을 깎아 경사도가 낮아졌으나 과거에는 경사가 심한 길이었다고 한다.
1592년 7월 8일에 웅치전투에서 후퇴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이곳 안덕원에 주둔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또한 1592년 7월 2일경에 남원쪽으로 이동했던 황진 부대가 다시 올라와 안덕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안덕원에 1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주성은 전주부윤이었던 권수(權燧)가 갑자기 병사하자, 이정란(李廷鸞)으로 하여금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이광 자신은 최후의 보루로서 남고산성에 들어가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3개소에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전주를 공격하던 일본군의 본진은 금산에 있었다. 한편 호남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진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산에 주둔하고 있던 고경명은 1592년 7월 9일에 금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해 전투를 벌이다가 다음날인 7월 10일에 전사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군이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에 대응해 식량의 확보와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전투이다.
[경과]
1592년 7월 8일에 웅치에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던 조선 관군과 의병대를 후퇴시킨 일본군은 다음날 소양천을 따라 이동해 전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웅치전투에서 많은 전력을 소비해서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일본군이 소양평에 도착했을 때는 안덕원마을에 남원쪽에서 이동해온 황진(黃進)의 부대와 웅치에서 후퇴한 이복남(李福男) 등 부대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또한 전주성에도 많은 수의 관군과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어 약화된 전력으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덕원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 관군은 소양평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의병장 이정란이 남긴 「수성유적(守城遺蹟)」에 따르면 “소양평 불당 앞에서 적을 만나 싸워 선봉을 쓰러 눕혔다[所陽坪佛堂前 與賊合戰 戮盡先鋒]”고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에 있는 단암사 미륵불상과 관련된 설화 등을 통해서 보면, 소양평에서 전투가 벌어져 조선 관군이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소양면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했다. 전주성의 방어망이 굳건하고, 웅치에서 전력이 약화되고, 안덕원에서도 패배한 일본군은 1592년 7월 10일경 웅치를 넘어 진안과 금산으로 후퇴했다.
[결과]
1592년 7월 9일경 전투가 벌어져 조선군이 승리했으며, 일본군은 1592년 7월 10일에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후퇴했다.
[의의와 평가]
안덕원전투는 웅치전투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전투이므로 웅치전투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권율은 웅치의 공이 행주의 공보다 크다고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 한 도가 이 싸움으로 인해 보존되었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승려 가스야스[和安]가 조선에 와서 연위사(延慰使) 이성구(李聖求)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임진왜란 중에서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세 곳을 헤아렸는데 웅치를 첫째로 꼽았다고 한다. 이것은 웅치전투가 실제 전투의 규모나 패전의 강도가 가장 크다는 것보다 일본군이 웅치 일대에서 패배해 호남을 점령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이 조선 침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