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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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普漢 |
영어공식명칭 | Lee Bo-han |
이칭/별칭 | 성한(聖漢),거두리 참봉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대길 |
[정의]
근대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애국지사.
[개설]
이보한(李普漢)[1872~1931]은 개신교에 입교한 후 평생을 전교 활동과 더불어 이웃과 함께했다. 특히 전주시와 완주군 일대 거지들과 함께했으며, 3.1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이다.
[활동 사항]
이보한은 애국지사, 기독교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명(異名)은 이성한(李聖漢), 별명은 ‘거두리 참봉’이다. 출생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익산시 목천포(木川浦) 당메[唐山]에 살던 부자 이경호(李敬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큰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미천한 신분이라 해서 서자(庶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성품이 호방하고 고고(孤高)하여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이보한이 종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부상을 당한 아버지를 정성껏 치료해 준 선교사의 선행을 보고 감복한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한다. 입교 후 1년 만에 전주에서 대표적인 전도사가 되었고, 이보한의 선행과 전교 활동은 파격 그 자체였으며, 민족의식도 강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에 올라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는데, 가는 곳마다 거지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경찰에 체포되면 유치장 여기저기에 배설하는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 석방되었다. 전주에서도 거지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배부했고, 3·1운동 후에는 거지와 기생들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고 한다. 이보한은 상갓집에 찾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받은 돈으로 거지들을 먹였으며, 부자집만 골라 다니며 거지들의 먹을 것을 챙겼다. 아버지가 소작인에게 빚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빚을 탕감해 주고 돌아온 이야기, 나무를 팔지 못한 나무꾼들을 부잣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팔아 준 이야기, 부잣집 아들과 거지의 옷을 바꿔 입힌 이야기, 거드름 피는 서울 양반에게 줄 뺨 돌린 이야기, 교인(敎人) 변호사를 찾아가 천국에 달아두라며 돈을 빌려다가 거지들을 먹인 이야기 등 이보한의 기행과 선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전한다. 자비로운 선행과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이보한이 1931년 8월 16일[음력] 별세하자, 전라도 거지 수백 명이 몰려와 상여를 꾸미고 장례절차를 주장하여 한국 초유의 걸인장(乞人葬)이 거행되었다.
[묘소]
이보한은 종교에 귀의하고 기행을 일삼던 시절에 전주이씨 문중에서 추방당했다. 이에 따라 유해(遺骸)는 종중의 묘지에 들어갈 수 없어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1982년 ‘문중 교인’들의 주선으로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색장리] 전주이씨 종중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보한은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竹林里)에 걸인들이 추렴해서 세운 ‘이공거두리애인비(李公거두리愛人碑)’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새겨 있다.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한평생 온후하고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 주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