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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071
한자 古墳
영어의미역 Ancient Tomb
이칭/별칭 옛무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박광춘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에 분포하고 있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무덤.

[5세기 이전 고분]

양산의 고분은 5세기 이전에는 양산시 북쪽에 위치하는 해발 약 50m 내외의 구릉부에 해당되는 소토리에 축조되었다. 매장 시설은 목관묘·목곽묘·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를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목곽묘는 지배층이 채용한 매장 시설로 세장방형의 평면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평면 형태를 가진 목곽묘는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의 목곽묘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신라 문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장품 중에서 대표적인 토기는 기종의 구성과 형태에서 가야 동부 지역과 비슷한 점이 많다.

[5세기 고분]

5세기 이후 양산의 고분 중심지는 북정동으로 옮겨졌다. 북정동에는 능선 정상에 부부총과 같은 대형 고분과 그 아래쪽 구릉 말단부에 소형 고분들이 분포한다. 부부총의 묘제는 수혈계 횡구식 석실분으로 횡구부가 단벽 중앙 상부를 이용하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와 거의 유사한 방식은 창녕 지역 고분에서도 확인된다. 부부총의 출토 유물은 그 당시 최고 지배층에 걸맞는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부부총과 인접한 금조총은 유구의 규모가 너무 소형이어서 피장자의 신분이 낮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의외로 출토 유물은 부부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금조총 출토 유물은 그 당시 공예 기술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경주 신라 왕족 무덤의 부장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로 보아 피장자는 신라와 깊은 정치적·혈연적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5세기에 양산에서 유행하는 대표적 묘제인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와 부부총 일부 유물은 창녕 지역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6세기 이후 고분]

6세기 이후에는 북정동과 인접한 신기리와 그 아래쪽인 하북정에 많은 고분이 축조되었다. 묘제는 5세기와 같은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이나 장축에 비해 폭이 넓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분 축조가 아래층으로 확대되고 추장이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을 추장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처음 고분을 축조할 때의 바닥 시설에 매장이 끝나고 새롭게 추장이 계속되면, 1차 상면 위에 새롭게 돌을 깔아 2차 시상을 조성한 것과 그 위에 다시 3차 시상을 만든 것도 확인된다. 북정리신기리 외에 명곡리중부동 등에도 고분이 분포한다. 이러한 고분의 분포로 볼 때, 삼국시대 양산은 상당한 강력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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