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덕진포 해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0430
한자 德津浦海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912년연표보기 - 덕진포 해전 발발
발생|시작 장소 덕진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왕건|견훤

[정의]

912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포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전투.

[역사적 배경]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태조 왕건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 내심 피하고자 하였다. 그 대신에 왕건궁예의 동의하에 수군을 이끌고 903년 3월부터 서남해안으로 진출하였다.

903년 왕건(王建)[877~943]은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처음 출병하여, 견훤(甄萱)[867~936]이 차지하고 있던 나주 이하 10군현을 쟁취하였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태조 왕건궁예(弓裔)[?~918]가 나날이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909년에 나주로 2차 출병을 하였다.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지금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에 머물렀다가 견훤이 오월국(吳越國)으로 보내는 배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왕건은 정주[지금의 황해도 개풍]에서 전함들을 수리한 후 군사 2,500명을 거느리고 광주의 진도군(珍島郡)과 고이도(皐夷島)[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를 점령하였다. 912년 왕건은 전함을 이끌고 나주 포구에 이르러 견훤이 이끄는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덕진포 해전이다. 덕진포의 한자 표기는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덕진포(德眞浦)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덕진포(德津浦)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 덕진포[지금의 무안군 몽탄면 덕암리]의 위치를 감안하면, 견훤의 전함들은 덕진포 쪽에, 왕건의 전함들은 몽탄 대교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견훤의 군대가 왕건의 전함을 수륙 협공할 수 있는 공간은 넓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어야 한다.

[경과]

견훤의 군대는 수군과 육군의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함들은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펼쳐져 있을 정도로 성대하였고, 육지에도 군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견훤의 군대를 보고 왕건의 장수와 군대는 겁을 먹고 근심하였다. 이에 왕건이 말하기를, “근심하지 마라. 전쟁의 승패는 군대의 의지가 하나로 뭉쳐 있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 수가 많고 적은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안정을 시켰다. 그리고 곧 진군하여 서둘러 공격하니 견훤의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절반 이상이었다. 왕건은 이 전투에서 견훤의 군사 5백여 급을 베었다고 한다. 그러자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지역 설화에는, 무안의 몽탄 서쪽에 파군교가 있는데 여기에서 왕건견훤의 군대가 육전을 벌였으며 왕건견훤의 군대를 깨뜨렸고 견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하였다고 한다.

[결과]

이러한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왕건은 903년 궁예의 부하로서 점령하였던 나주 관내 여러 군현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서남해안에서 배타적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영암의 최지몽, 나주의 오다련과 같은 세력들의 지원 이외에도 서남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과 곡식 등을 확보하게 되었다. 왕건은 이를 기반으로 고려 건국의 기틀을 세웠으며,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1.28 인물 생몰년 추가 및 수정 왕건(王建)[877~?] ->왕건(王建)[877~943] 견훤(甄萱)[867~935] -> 견훤(甄萱)[867~936]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