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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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師浚 |
이칭/별칭 | 경심(景深),송원(松園),이회재(二懷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성운 |
[정의]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개설]
신사준(愼師浚)[1734년~1796]은 성리학을 전공하였으며, 궁핍한 생활에서도 책을 읽어 경전에 두루 통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는 변을 맛보고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 간호를 하였고, 상을 치를 때도 예를 다하였다. 이러한 신사준의 효행을 보고 고을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다. 관직은 정릉 직장에 이르렀고, 시무(時務) 10개 항을 상소한 바 있다.
[가계]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경심(景深), 호는 송원(松園) 또는 이회재(二懷齋)이다. 참봉 신성윤(愼聖尹)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신창징(愼昌徵)이다.
[활동 사항]
1773년(영조 49)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4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휘릉 참봉을 거쳐 1796년(정조 20)에는 정릉 직장(靖陵直長)에 이르렀다. 같은 해 3월 7일에 수령을 잘 택할 것, 과거(科擧)의 폐단을 혁파할 것, 양역(良役)을 균등하게 할 것, 교화를 돈독히 할 것,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 학교를 정비할 것, 정도(正道)를 숭상할 것, 벼슬아치의 선발을 신중히 할 것, 전제(田制)를 정립할 것, 간쟁을 받아들일 것 등의 시무 10개 조항을 상소하였고, 정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신사준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는 변의 맛을 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가며 병간호를 하였으며, 상을 치를 때에는 모든 예를 다하였다.
이러한 신사준의 효행을 보고 자란 아들 신술현(愼述顯)과 신상현(愼相顯) 형제는 신사준이 한양에 가 있는 사이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십 일을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결국 과다출혈로 죽었다. 신술현이 죽고 난 후에 신술현의 처 박씨(朴氏)도 심한 병에 걸렸지만 약을 마다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신사준의 딸인 박항수(朴恒壽) 처 거창 신씨(居昌愼氏)도 당시 열다섯 살이 채 안 되었으나 아픈 어머니를 위해 대신하여 자신이 병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그 말처럼 이른 나이에 병이 들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어사 정만석(鄭晩錫)이 조정에 보고하여 신술현, 신상현 형제에게 정려를 내렸다. 또한 이민보(李敏輔)가 신사준의 어린 딸과 며느리 박씨의 효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의 『풍서집(豊墅集)』에 「신씨 효자 형제 정문기(愼孝子兄弟㫌門記)」를 남겼다.
[상훈과 추모]
1812년(순조 12) 3월 13일에 예조에서 ‘각 식년(式年)의 경외(京外) 충·효·열의 문서’를 조정에 보고했는데, 신사준은 효자로서 증직(贈職) 대상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