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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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집필자 | 김지민 |
[정의]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사람이나 물품을 수용하기 위해 건물·구조물 등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 또는 그 구축물.
[변천]
영암군은 선사 시대의 유적인 고인돌과 구덩식 주거, 백제 고분, 각종 불교 유적 등 다양한 유적이 수없이 분포되어 있는 호남의 대표적인 역사 고장이다. 또한 일본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의 원조인 왕인 박사와 풍수지리설의 창시자인 도선 국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영향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영암군 곳곳에 다양한 유형의 조선 시대 건축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건축적인 변화는 현 영암읍 내에 있었던 동헌, 객사, 성곽 등의 건축물이 한 건도 남김없이 훼철된 것이다. 즉 관아 건축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는데 이러한 양상은 인근 다른 시군도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현대기에 들어서 영암 지역에 지어진 건축물, 즉 현대 건축은 특별히 눈에 띠는 것은 없다. 영암읍내에 영암군청과 경찰서, 문화 회관 등 관공용 위주의 3~4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있고 기타 2~3층 규모의 근린 생활 시설 건물이 주류를 이룬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삼호읍의 대불 국가 산업 단지[영암 테크노폴리스]가 활성화되면서 특히 조선 산업 관련의 대규모 공장 건축이 많이 건립됐다.
2008년경부터는 농촌 마을에 살림집으로 한옥을 건립하는 사례가 많이 늘어났다. 이는 전라남도 한옥 보급 정책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영암군에서는 군서면의 동계·모정 마을, 신북면의 산정 마을, 학산면의 영흥 마을 등이 있다.
[주거 건축]
조선 시대 살림집은 외형적으로 크게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주로 일반 서민이 살았던 초가집이며, 다른 하나는 사대부 내지는 향촌의 부농 계층이 살았던 기와집이다.
초가집은 일자형으로 규모는 정면 기준 3~4칸 정도로 작고 실내는 주로 부엌과 방 위주로 꾸며졌다. 반면에 기와집은 일자형뿐만 아니라 ‘ㅁ’ 자, ‘ㄷ’ 자 같은 형식도 있고 칸수도 정면 기준 5~6칸 정도로 늘어나으며, 대청이 크게 발달했다.
현재 영암 지역에는 서민이 살았던 조선 시대의 민가는 없고 17세기 이후에 건립된 몇 채의 상류 및 부농층 가옥이 있다. 영암 최성호 가옥, 영암 현종식 가옥, 영암 문창집 가옥, 조종수 가옥, 영암 월곡리 전씨 고택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영암 현종식 가옥만 제외하고 모두 일자형이다. 내부는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방 배치가 비교적 단순하고 앞쪽으로는 반 칸 퇴를 두어 그곳에 마루를 설치했다. 현종식 가옥은 안채가 ‘H’ 자로서 살림집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교 건축]
영암군에서 건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사찰 건축은 단연 도갑사 해탈문이다. 1473년에 건립된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중앙 칸은 통로로 되어 있고 양 협칸에는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건축 양식은 이출목을 둔 주심포 양식이다. 도갑사 해탈문은 현재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갑사는 최근에 중층으로 대웅전을 새로 중건하였고, 또한 광재루 및 장랑, 승방 등을 중건 및 신축하여 경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유교 건축]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치국 이념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향교라는 지방 국립 학교를 세운 것이다. 물론 향교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나 수적으로나 제도상으로 조선의 향교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암 향교도 그러한 취지로 1402년(세종 2) 영보역(永保驛) 근처에 창건되었으며 그 후 1603년(선조 3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의 영암 향교는 6·25 전쟁 중에 전소가 된 것을, 1951년에 대성전부터 중건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암 향교는 문묘 영역[제향 구역]이 우측에 자리한 우묘 좌학(右廟左學) 배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이 이건 또는 중건 과정에서 변경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중기 이후로는 문중 중심으로 많은 서원과 사우가 영암 지역에 창건되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녹동 서원, 죽정 서원, 구암사, 장동사, 서호사, 죽봉사, 송양사, 충효사, 모산사 등이 있다. 이들 서원·사우는 아쉽게도 1868년 흥선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후 새롭게 복원이 된 것이다. 건축 형식은 앞쪽에 강당을 배치하고 그 후면에 사당을 건립한 전학 후묘(前學後廟) 개념으로 일곽을 구성했다.
[누정 건축]
누정은 조선 시대 유교 문화가 낳은 사대부들의 지적 교류의 공간이다. 보통 덕망이 있는 향촌 인물이나 또는 정계에서 물러난 후 향리에 내려온 인사들이 소요, 은둔, 교류, 강학 등의 목적으로 풍광이 좋은 곳에 누정을 건립했다.
영암 지방에도 문중의 띄어난 인물이 주체가 되어 강학소 내지는 교류의 장으로 많은 정자가 건립됐다. 한편 영보정, 장암정, 회사정, 열무정의 경우처럼 향약(鄕約)의 집회소 역할을 한 정자가 영암 지역에 특히 많이 건립된 점은 매우 주목이 가는 부분이다.
누정의 건축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단층 구조다. 내부는 모두 우물마부에 온돌방을 드린 혼합 구조[존양루, 죽림정, 아천정, 부춘정] 정자도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양식은 간결한 민도리식 내지는 익공식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