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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리 백자 가마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331
한자 南松里白瓷窯址
이칭/별칭 사기 점골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인곡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성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남송리 백자 가마터 -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인곡 마을
성격 백자 가마터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인곡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가마터.

[개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만들어졌지만 청자가 중심이던 당시에는 성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세종 대[1418~1449]에 왕실에서 사용할 만큼 발전하였고 중국 왕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세조 대[1455~1468]에는 이전에 비해 널리 확산되었는데 금령(禁令)을 내려 왕실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규제에도 불구하고 백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아 일반 사대부에게는 1616년(광해군 8) 이전부터 확대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기술이 확산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변천]

평저(平底)의 굽을 갖고 있으며 굵은 모래 비짐을 받쳐 포개 굽고 있어 남송리(南松里) 백자(白瓷) 가마터는 18세기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남송리 백자 가마터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인곡 마을에 있다. 영암군 금정면 소재지에서 장흥군 유치면으로 7㎞ 정도 가면 입석제(立石堤)가 있고, 입석제에서 좌측으로 포장길을 따라 3㎞ 정도 가면 인곡 마을에 이르게 된다. 가마터는 인곡 마을 동쪽 1.5㎞ 지점 전일수 소유의 감나무 밭에 위치한다. 이곳은 차일봉(遮日峰)[382m] 서쪽 기슭으로, 마을에서는 남송리 백자 가마터를 ‘사기 점골’로 부르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와 결과]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으며 『영암군의 문화 유적』과 『영암군지』, 『문화 유적 분포 지도』 등의 문헌에 남송리 백자 가마터에 대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현황]

남송리 백자 가마터는 약간 급경사를 이루는 산기슭에 동-서 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가마터 주위에 백자 조각을 비롯하여 초벌구이 조각과 요도구인 도지미[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되는 받침]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마터 옆에는 차일봉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흐르고, 또한 소나무가 울창하여 가마 운영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자는 발을 비롯한 반상기(飯床器)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생활 용기를 생산하던 가마로 판단된다. 인근의 안노리에도 변형 오목 굽에 태토 비짐을 받쳐 포개 굽기를 한 17세기 중반의 백자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송리 백자 가마터임진왜란 이후 지방까지 확산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지방 백자의 양상을 알려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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