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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329
한자 窯址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집필자 한성욱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도기와 분청사기, 백자 등을 구웠던 가마터.

[개설]

가마는 점력을 가지고 있는 바탕흙으로 형태를 만든 후 이것을 높은 온도로 구워 내는 생산 시설을 말한다. 가마에서 구워 내는 그릇은 바탕흙의 종류와 만드는 과정, 굽는 온도, 유약 종류, 무늬와 장식 기법, 제작지, 용도 등에 의하여 다양하게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굽는 온도와 유약의 유무 등으로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 옹기(甕器) 등으로 나눈다. 가마는 기술의 발전과 대외 교류 등을 통해 발전되어 구조가 바뀌며, 구워 내는 그릇 역시 그 사회의 정치와 경제, 문화 등의 변화에 의해 변천을 거듭한다. 즉,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그 품질과 발전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암 지역에 분포하는 가마터와 생산된 도자의 성격은 영암 사람들의 생활 문화뿐만 아니라 영암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고대와 고려 시대의 도자 문화]

영암 지역은 영산강을 끼고 있는 고대 문화의 핵심 지역으로 일찍부터 독창적 묘제인 독무덤이 성행했던 곳으로 도자 문화가 발전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암과 함께 옹관 문화의 핵심 지역인 나주에서는 옹관을 만들던 가마가 나주 오량동 요지[사적 제456호]에서 확인되었으나, 영암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그 정치적 위상과 문화적 역량을 고려하였을 때 통일 신라의 가마도 영암 구림리 요지[사적 제338호] 이외에 확인되지 않은 것도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고려 시대는 고화도의 도기를 만들던 전통적 기술과 중국과의 대외 교류에 의해 청자가 발생하여 독자적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과 교류가 쉬웠던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대부분 청자가 생산되었다. 전라남도 지역도 대단위 밀집 분포를 보이는 강진과 해남 뿐만 아니라 고흥과 장흥, 함평 등 해안 지역에서 청자 발생기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다. 또한 영암은 중국으로 나가는 뱃길이 열려 있던 국제 항구 상대포가 있었으며, 통일 신라 말 대단위로 운영되었던 구림리 도기 가마의 운영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 어느 지역보다 청자 발생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발생기 이외에도 장흥과 나주 등에서 지역의 수요를 담당하였던 품질이 떨어지는 고려 중기의 청자 가마터들도 확인되고 있어 고려 시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였던 영암 지역에서 앞으로 청자 가마터가 확인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영암 지역은 고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옹관묘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도자 가마는 영암 구림리 요지 이외에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앞으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 성격을 정확히 밝혀야 하겠다.

[조선 시대의 도자 문화]

조선 시대 영암 지역의 도자 문화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 320여 개소의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기소와 자기소들은 지역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공급하는 동시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릇들을 공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영암군에는 군의 서쪽 곤미(昆湄)[현재 영암군 미암면학산면 일대]의 다점리(多岾里)에 중품 자기소가 2곳 있고, 군의 서쪽 곤미의 율점(栗岾)에 하품 도기소가 2곳 있다는 기록이 있어 공납용 분청사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주의 남쪽 금마리(金磨里)에 있었던 하품 도기소 1곳도 현재 영암군 금정면으로 추정되고 있어 전라남도에서 함평의 6곳 다음으로 많은 5곳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분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암 지역의 백자 생산 수준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3명의 외공(外工) 사기장(沙器匠)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순천[6명], 나주[4명] 다음으로 많은 3명의 사기장이 배치되어 비중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요성에 비해 확인된 가마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또한 사기장이 배치되지 않은 지역에 비해서도 가마터가 적으며 이른 시기의 백자 가마터가 확인되지 않은 것도 검토하여야 하겠다. 이는 해남 등으로 행정 구역이 이전된 측면도 있으므로 앞으로 정확한 학술적 검토가 있어야 하겠다.

영암 지역 도자 가마터의 절대적인 수량을 차지하는 조선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895년 이후 여러 차례 단행된 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암에서 분리된 해남군 북일면·북평면·송지면·계곡면·옥천면 일부와 강진군 성전면 일부, 완도군 일부, 그리고 나주에서 영암으로 편입된 금정면신북면, 시종면 지역을 각각 별개의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재의 유적 현황보다는 조선 시대 영암의 영역이었던 해남과 강진, 완도 지역에 분포한 가마터 현황과 성격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재 영암군으로 편입된 금정면신북면, 시종면 지역에 분포하는 가마터는 영암군의 전체적인 분포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일 뿐으로 시대성을 반영하는 자료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조선 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자기가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어 후기에도 백자 생산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으며, 1906년 영암으로 편입된 금정면신북면의 나주 관련 기록도 향후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 즉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기록된 원정면(元井面)[금정면] 신옹점(新瓮店)과 비음면(非音面)[신북면] 옹점(瓮店), 금마면(金磨面)[금정면] 부점촌(富店村)·내점촌(內店村)·중점(中店)·외점(外店), 또한 『호남읍지 나주목 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에 기록된 금마면 내점(內店)·중점(中店)·외점(外店)·신옹점(新瓮店)이 이들에 해당한다.

[가마터 현황]

영암 지역에 분포하는 가마터는 도기 가마터의 경우 군서면 서구림리 1곳에서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 가마터 역시 학산면 상월리 1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분청사기의 경우 5곳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된 곳은 1곳에 지나지 않아 미암면학산면, 금정면 일대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한편 상월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는 고급의 인화문 분청사기와 제기(祭器), 요도구인 갑발 등이 확인되고 있어 고급의 분청사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월리 가마터가 곤미에 설치된 자기소와 도기소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영암군에 분포하는 가마터는 17세기 이후의 백자 가마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임진왜란 이후 백자가 본격적으로 지방에 확산되는 시기에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 가마터는 유실된 덕진면 금강리 상촌 마을 가마터를 포함하여 모두 9곳에 분포하는데, 각각 3곳이 분포하고 있는 학산면신북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외에 금정면미암면에 각각 1곳이 분포하고 있다. 그릇은 품질이 떨어지는 발과 접시 등 지방 수요의 일상 생활용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가마터는 기록에 비해 조사된 수량이 많지 않아 향후 추가적인 조사가 있어야 그 성격을 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의와 과제]

영암 지역은 국내 최초의 시유 도기가 생산되어 고려청자가 발생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도자 생산이 매우 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헌 기록에 기록된 중요성에 비해 조사된 가마터가 많지 않아 그 성격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도기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어 구림리 도기 가마의 계승 발전 등을 밝히기 위해서도 향후 영암 지역 도자 문화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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