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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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山里白瓷窯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양동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성욱 |
현 소재지 | 장산리 백자 가마터 -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양동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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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백자 가마터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양동 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가마터.
[개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만들어졌지만 청자가 중심이던 당시에는 성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세종 대[1418~1449]에 왕실에서 사용할 만큼 발전하였고 중국 왕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세조 대[1455~1468]에는 이전에 비해 널리 확산되었는데 금령(禁令)을 내려 왕실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규제에도 불구하고 백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아 일반 사대부에게는 1616년(광해군 8) 이전부터 확대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기술이 확산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변천]
굽이 높고 다량의 모래 비짐을 받쳐 포개어 굽고 있어 장산리(長山里) 백자(白瓷) 가마터는 조선 후기에 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백자의 대량 유입으로 쇠퇴해 가던 조선 후기 지방 백자의 양상을 보여 준다.
[위치]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에 있는 장산 저수지의 왼편 문화 유씨 선산과 양동 마을 주민 박현철의 밭에 위치한다. 또한 이곳에서 300m 거리에 비슷한 성격의 가마터가 추가 분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와 결과]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으며 『영암군의 문화 유적』과 『영암군지』, 『문화 유적 분포 지도』 등의 문헌에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현황]
산기슭과 밭에 가마터와 폐기장이 2~3m 높이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대접, 발, 합, 종지 등의 백자가 주로 확인되고 있어 장산리 백자 가마터는 생활 용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