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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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湘 |
영어공식명칭 | Uisang |
이칭/별칭 | 의상,대성원교국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통일신라시대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의상(義湘)[625~702]은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아버지는 김한신(金韓信)이다. 대한불교화엄종(大韓佛敎華嚴宗)의 개조(開祖)이다.
[활동 사항]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 따르면, 의상은 29세 때인 653년(진덕여왕 7)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藏舍利條)에는 「부석본비(浮石本碑)」를 인용하여 650년(진덕여왕 4)에 원효(元曉)[617~686]와 함께 당으로 유학을 하러 가던 중 어려움을 만나 귀국하였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또 「부석본비」에는 의상이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늦어도 650년 이전에 출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상은 650년 1차 유학 시도에서 육로를 통해 당으로 가던 중 고구려에서 첩자로 의심을 받아 수십 일간 구금되었다가 귀국하였다. 661년(문무왕 1)에 다시 당으로 유학하여, 현 중국 산시성[陝西省] 중난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智儼)[602~668]의 문하에 들어갔다. 668년에 지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간 수행한 이후 670년(문무왕 10)에 신라로 돌아왔다.
의상이 귀국 이유에 대해서도 기록마다 다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화엄의 큰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신라로 귀국했다고 한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당 고종이 신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문무왕에게 전해주기 위해 귀국했다고 한다. 신라에 돌아온 의상은 670년 낙산(洛山)에서 14일간 재계(齋戒)하고 관음보살을 뵈었다. 관음보살의 말씀에 따라 한 쌍의 신비로운 대나무가 솟아난 산꼭대기[山頂]에 낙산사를 창건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 보주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676년(문무왕 16)에는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의상이 당에서 유학할 때 인연을 맺었던 선묘(善妙) 낭자가 용이 되어 반석(磐石)을 공중에 띄웠다는 창건 설화가 전한다. 의상이 부석사에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 있을 때 문무왕이 전장(田莊)과 노복(奴僕)을 지원하였으나 『열반경(涅槃經)』의 가르침을 내세워 모두 거절하였다. 의상은 소백산 자락 부석사를 중심으로 수도 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재 소백산 곳곳에 의상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구전이나 사기(寺記)에 따르면, 영주 지역에 있는 초암사(草庵寺), 성혈사(聖穴寺), 비로사(毘盧寺), 영전사(靈田寺) 등을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후 의상은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하였다.
[사상과 저술]
의상은 지엄의 문하에 있을 때 이미 『잡화경(雜花經)』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였다. 심오한 이치에 대해서 지엄과 함께 논의하였으며,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인 도선율사(道宣律師)[596~667]와 교유하였다. 신라로 귀국한 이후에는 중국 화엄종의 제3조 법장(法藏)[643~712]이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지어 의상에 보내 존경을 표하는 등 관계를 지속하였다.
의상의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비롯해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을 남겼다.
의상에게는 약 3천 명 제자가 있었다. 문하 가운데 오진(悟眞), 지통(智通)[655~?],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681~?] 등 열 명은 아성(亞聖)으로 불렸다. 의상의 제자들은 의상의 강의 내용과 가르침을 적은 『추동기(錐洞記)』, 『도신장(道身章)』,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등을 저술했다. 신라인들은 의상을 금산보개(金山寶蓋)[부처]의 화신으로 칭송하였다.
[상훈과 추모]
의상은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다. 경주 흥륜사 금당(金堂)에는 10성(聖)을 진흙으로 빚어서 모셨는데, 의상은 동쪽 벽에 경방(庚方)을 향해 앉은 모습으로 아도(我道), 염촉(厭髑)[506~527], 혜숙(惠宿), 안함(安含)[578~640]과 나란히 자리하였다. 1101년(숙종 6) 8월 조정은 의상과 원효를 동방성인(東方聖人)으로 평하면서, 의상을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로 추증하였다. 동시에 비(碑)를 세워 의상의 덕을 기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