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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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益禧 |
영어공식명칭 | Jeon Ik-hui |
이칭/별칭 | 자수(子綬),중수(重綏),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전익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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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전익희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전익희 성균관박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1년 - 전익희 예조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4년 - 전익희 형조정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 - 전익희 강진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40년 - 전익희 함경도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전익희 봉산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전익희 선산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59년 - 전익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38년 - 전익희 방산서원 제향 |
출생지 | 전익희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
묘소|단소 | 전익희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
사당|배향지 | 방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옥천(沃川) |
대표 관직|경력 | 병조정랑|선산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전익희(全益禧)[1598~1659]는 문과 급제 후 병조정랑·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으며, 청렴한 관직 생활로 칭송을 받았다.
[가계]
전익희의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옥천전씨 영주 입향조인 상장군 전희철(全希哲)[1425~1521]의 5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전응두(全應斗), 할아버지는 군자감직장을 지낸 전개(全漑), 아버지는 봉사를 지낸 전뇌(全磊),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정호인(鄭好仁)[1597~?]의 딸 진주정씨(晉州鄭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윤을 지낸 김우익(金友益)[1571~1639]의 딸 선성김씨(宣城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첨지 민각(閔覺)의 딸 강주민씨(剛州閔氏)이다.
[활동 사항]
전익희는 1598년(선조 31) 지금의 영주시 상망동에서 출생하였다. 1624년(인조 2) 문과에 급제하였고, 곧 성균관정자에 제수되었다. 1625년 성균관박사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30년 성균관전적, 1631년 형조좌랑과 예조좌랑에 제수되었으며, 1632년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34년(인조 12) 형조정랑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전라도도사·성균관직강·예조정랑을 지냈다. 1636년 강진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단속하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1639년 예조정랑으로 복직하였으며, 1641년에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전익희는 1642년(인조 20)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권신 김자점(金自點)[1588~1651]을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해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었다. 1645년 봉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1648년 병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650년(효종 1) 고산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1652년 충청도도사, 1653년 장흥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풍토병으로 거듭 사직하였다. 1657년 선산부사에 제수되자 녹봉을 내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학교도 흥하게 하였으나, 임소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전익희는 어려서는 김지복(金知復)[1568~1635]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성장해서는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집으로 2권 1책의 『설월당집(雪月堂集)』이 전한다.
[묘소]
전익희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칠성산에 있다. 묘소 인근에는 전익희가 지은 칠성루(七星樓)와 할아버지 전개가 지은 휴계재사(休溪齋舍)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60년(현종 1) 선산의 백성들이 전익희가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해서 송덕비를 세웠다. 1633년(인조 11)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전희철을 제향하는 방산리사(方山里社)가 건립되었으며, 후대에 전익희·전명룡(全命龍)[1606~1667]을 추향하였다. 방산리사는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8년 방산서원(方山書院)으로 복설 되었다. 행장은 1832년(순조 32) 이인행(李仁行)[1758~1833]이 지었으며, 묘갈명은 1833년 박시원(朴時源)[1764~1842]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