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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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新羅時代 |
영어공식명칭 | Unified Silla Period |
이칭/별칭 | 남북국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부터 고려 건국 이전까지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백제시대 탕정군(湯井郡)이었던 아산 지역은 671년(문무왕 11)에 탕정주(湯井州)로 승격되어 총관(摠管)이 임명되었다가 681년(신문왕 1) 다시 탕정군으로 격하되어 웅주(熊州)에 예속되었다. 그후 757년(경덕왕 16) 탕정군, 음봉현(陰峯縣), 기량현(祁梁縣)으로 확정되었다. 아산 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는 실옥동유적을 비롯하여 장재리 아골유적, 장재리 안강골유적,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등이 있는데, 주거지와 분묘(墳墓)[무덤] 유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이르러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정비하였다. 9주는 옛 삼국 지역에 각각 3개씩 설치하였으며, 백제 지역에는 웅천주[웅주], 완산주, 무진주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아산 지역은 웅천주에 속하게 되었다. 웅천주 관내에는 13개 군과 29개 현이 있었다. 그리고 신문왕 대에 정비된 9주 체제하의 군현의 명칭은 대부분 백제시대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백제시대 탕정군이었던 아산 지역은 671년에 탕정주로 승격되어 총관이 임명되었다가 681년 다시 탕정군으로 격하되어 웅주에 예속되었다. 그후 757년에 다시 군현명의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대부분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변경되었다. 탕정군은 681년에 주를 폐지하고 군이 되었지만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술현(牙述縣)은 음봉현으로 변경되었으며 굴직현(屈直縣)은 기량현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같은 명칭 변경은 경덕왕의 왕권 강화 추진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재지(在地) 세력의 지역 지배를 약화시키고 중앙과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지방 통치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백제시대의 5부-37군-200[250]현이었던 것을 3주-2소경-37군-104현으로 개편하여 그 수를 대폭적으로 축소시켰다. 이 과정에서 군을 현으로 바꾸거나 현을 군으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신라적 기준으로 옛 백제 지역의 군현을 정비한 것이다. 아산 지역은 탕정군이 일시적으로 주로 승격되고, 현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통치되었다.
군(郡)에는 군태수(郡太守), 현(縣)에는 그 격에 따라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다. 주·군·현 밑에는 촌(村)이라는 작은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촌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주(村主)가 관할하였다. 촌주는 그 지방의 토착 세력가로 임명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를 받았다. 그리고 주·군·현 밑에는 향(鄕)과 부곡(部曲)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 주민의 신분은 촌민과는 달리 천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촌락 농민들은 호별(戶別)로 농토를 소유하고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아산 지역의 역사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기록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712년(성덕왕 11)에 "여름 4월에 어가가 온수에 행행(行幸)하였다."는 내용만이 확인될 뿐이다.
성덕왕은 35년간 재위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즉위하던 해에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705년(성덕왕 4) 10월에는 나라 동쪽 주군에 기근이 들자 이듬해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휼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영 농민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722년(성덕왕 21) 8월에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직접 민정 시찰에 나서 주군을 순시하였다. 711년(성덕왕 10) 10월에는 나라 남쪽의 주군을 순수(巡狩)하였고, 712년(성덕왕 11) 4월에는 온수에 행행하였으며, 718년(성덕왕 18) 2월에는 나라 서쪽의 주군을 순무(巡撫)하여 친히 연로한 사람과 환과고독(鰥寡孤獨)[늙어서 아내 없는 사람, 늙어서 남편 없는 사람, 어려서 어버이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따라서 성덕왕의 온양 지역 행차는 지방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한 순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탕정군이 일시적으로 주로 승격되고 현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성덕왕이 직접 순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아산 지역은 백제 고지(故地) 지배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발굴 조사의 증가로 통일신라시대 유적이 확인되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구체적인 문화상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는 실옥동유적을 비롯해 장재리 아골유적, 장재리 안강골유적, 명암리 밖지므레유적 등이 있다. 장재리 아골유적에서는 주거지 및 분묘 유구(遺構)와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 장재리 안강골유적에서는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2기가 확인되었으며 유물로는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명암리 밖지므레유적에서는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 1기와 돌덧널무덤 3기가 확인되었는데, 흑색 사발[완(碗)]이 출토되어 7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실옥동유적에서는 돌덧널무덤 2기가 조사되었는데, 면을 다듬은 장방형의 할석(割石)[강의 돌이나 산돌과 같은 자연돌을 적당한 크기로 깬 돌]을 이용하여 벽면을 조성하였으며 세장방형(細長方形)[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형태이다. 유물로는 석제 그릇, 사발과 뚜껑이 조합을 이룬 토기, 그리고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가 출토되었다.
와우리유적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로 추정되는 돌덧널무덤 24기가 확인되었는데, 이들 무덤 중 일부에서는 도장무늬토기[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가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산성으로 탕정면 용두리에 있는 꾀꼴산성이 있는데, 문지(門址)·치성(雉城)[성벽 바깥으로 덧붙여 쌓은 성], 건물지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봉곡사가 진성여왕[재위 887~897] 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유적에 대한 조사는 상대적으로 적어 문화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관련기록]
『삼국사기』 권36 잡지5 지리3에 "탕정군은 본래 백제의 군이었는데, 문무왕 11년 당나라 함형 2년[671년]에 주(州)로 삼고 총관을 두었다가 함형 12년[681년]에 주를 폐지하고 군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그대로 썼는데, 지금의 온수군(溫水郡)이다. 영현(領縣)이 둘이다. 음봉현[또는 음잠(陰岑)이라고도 함]은 본래 백제 아술현으로 불렸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의 아주(牙州)이다. 기량현은 본래 백제 굴직현으로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의 신창현(新昌縣)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11년[712년]에는 "여름 4월에 어가가 온수에 행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