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민간인 학살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35
한자 牙山民間人虐殺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성공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9월연표보기 -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 발생
발단 시기/일시 1951년 1월 4일 - 1·4후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1월 18일 - 미군 둔포면사무소 근처 폭탄 투하
종결 시기/일시 1951년 1월연표보기 -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아산~예산 가도 -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선장면·신창면
발생|시작 장소 너더리부락 뒤 과수원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용화리
발생|시작 장소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구령리
발생|시작 장소 성재산 -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 신흥리
발생|시작 장소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둔포리
성격 사건

[정의]

6·25전쟁 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건.

[개설]

6·25전쟁 기간 동안 충청남도 아산에서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여러 건의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민간인 학살사건은 크게 북한 인민군이나 좌익 세력에 의해 일어나거나, 북한 인민군 퇴각 이후 부역자 처단을 명목으로 반공 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자행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오인에 의한 학살사건도 있었다.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의 대표적인 예로 1950년 9월 말 북한 인민군의 퇴각 당시 도고면선장면 일대에서 일어난 좌익 세력 주도의 학살사건, 1950년 10월~11월과 1951년 1월 북한 인민군 부역자에 대한 처단을 명목으로 한 반공 세력들의 학살사건, 1951년 1월 초 미군의 폭탄 투하에 의한 둔포 양민 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의해 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10여 일 남짓 되는 7월 8일에는 충청남도 아산 부근의 천안을 점령하였다. 아산 역시 천안이 점령당한 7월 8일을 전후하여 북한 인민군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여 7월 10일에는 온양읍내가 점령당하였다. 북한 인민군이 아산을 점령하자 자치 인력도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 인민군의 퇴각이 결정되자 좌익 세력과 패잔병 세력은 아산에서 퇴각하면서 경찰, 공무원 등은 물론 무고한 민간인들도 무참히 죽였다.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아산에 들어오기 전인 1950월 9월 27일 반공 우익 세력들이 주요 관공서를 점령하였다. 이후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과 국군 병력이 아산에 들어왔다.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하였으나 다행히 아산까지는 내려오지 않았으며, 이 상황이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이어졌다.

[북한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

북한 인민군은 1950년 9월 15일 미군을 중심으로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월 26일 천안이 UN군에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인민위원회를 이끌던 노동당원, 지역 치안대원 등과 함께 퇴각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양민들을 학살하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1950년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아산~예산 가도 변에 있었던 도고면·선장면·신창면에서는 퇴각하던 북한 인민군 잔류병과 지역의 좌익 자치 세력 등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도고면 금산리에서는 9월 30일 UN군이 아산에서 예산으로 가려다 실패하여 다시 아산으로 돌아가자, 길가에 있던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이 마을 노인을 죽이고 가축을 모조리 잡아먹었다고 한다. 신창면에서도 9월 27일 후퇴하던 북한 인민군 병력들이 신창면에 들어온 후 잠시 반공 청년들이 점령하고 있던 신창지서를 습격하여 갇혀 있던 좌익 세력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3일 동안 반공 우익 인물 100여 명을 학살하였다.

한편, 미군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도고면·선장면·신창면 이외에도 온양읍 용화리 너더리부락 뒤의 과수원에서 온양내무서에 갇혀 있던 40여 명을 모조리 학살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곡교천 이북의 여러 지역에서도 학살의 징후가 나타났다.

[부역자 처단을 명목으로 한 민간인 학살]

북한 인민군이 아산에서 퇴각하면서 그 자리는 반공 우익 세력이 대체하게 되었다. 반공 우익 세력들은 1950년 9월 26일 UN군의 천안 수복 소식이 가장 먼저 전달된 탕정면과 온양읍으로부터 천안에서 가장 먼 도고면에 이르기까지 치안대를 조직하는 등 공개적인 자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치안대가 한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북한 인민군 부역자들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10월 4일 온양경찰서가 공식적으로 복귀한 후에는 경찰 측에서도 부역자를 처단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고, 서울을 다시 빼앗겼던 1951년 1·4후퇴 이후에도 나타났다. 이때는 예비검속의 명목으로 처단한 것이었다. 치안대는 부역자만을 색출하여 처단하였다고 하나, 실제적으로 부역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임을 당하는 등 학살의 단계에 이르기도 하였다.

온양경찰서로 이송되어 붙잡혀 있던 자들은 10월 중순 즈음 탕정면 구령리[현 배방읍 구령리]와 배방면 신흥리[현 배방읍 신흥리] 성재산 등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각 지역 지서에 붙잡힌 자들 중에는 경찰서로 이송되기 전 학살당하였다. 탕정지서에 자수하거나 붙잡힌 300여 명의 탕정면 주민들은 10월 하순 탕정지서 뒷산에서, 염치읍 대동리·산양리 주민들은 9월 말부터 10월에 걸쳐 성재기 공동묘지·염치치안대가 있던 삼서국민학교·뒷산 방공호 등에서, 선장지서에 붙잡힌 자들은 11월 초 쇠판이골에서, 신창에서는 10월 20일을 전후해 오목리 창고와 앞산에서 학살을 당하였다.

1·4후퇴 직후에는 배방면과 신창면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학살은 주로 일가족 단위로 붙잡혀 단체로 학살당하는 형태였다. 적색분자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부역혐의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면서 가족까지 붙잡은 것이다. 배방면에서는 1월 7~8일 후퇴[피난]를 위해 도민증을 발급해준다는 구실로 주민들을 곡물 창고에 모이게 한 뒤 성재산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이 시신들은 중리에 있는 폐금광에 유기하였다고 하는데, 2018년 2월부터 유해 발굴에 나서 3월 초 40여 구를 발굴하였다. 200~300명의 시신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창면에서는 1월 중순에 150여 명이 총살당하였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1951년 1월 8일 둔포면 둔포리 면사무소 근처에 미군기가 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다. 폭탄이 떨어진 곳은 1·4후퇴로 인해 남쪽으로 피난 가려던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피난민들은 혹한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둔포면사무소 창고와 주변 민가에 머물렀다가 변을 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학살을 당한 자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연령대의 구분이 없었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 경찰이나 치안대의 조사를 받았으며, 총살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생매장을 당하였다. 이러한 학살사건은 지금까지도 큰 논란이 되고 있으며, 2000년대에는 관련 사건에 대한 진술 및 실사를 통해 실제로 학살사건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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