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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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禾洞-遺跡 |
영어공식명칭 | Remains in Yonghwa-dong Gajaegol |
이칭/별칭 | 아산 용화동 가재골 유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용화동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나건주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4월 13일~2007년 2월 24일 - 충청문화재연구원 용화동 가재골유적 1차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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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7년 11월 19일~2008년 3월 14일 - 충청문화재연구원 용화동 가재골유적 2차 발굴 조사 |
원소재지 | 용화동 가재골유적 - 충청남도 아산시 용화동 가재골 및 장골 일대 |
성격 | 주거지 유적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용화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 마을 유적.
[위치]
충청남도 아산시의 용화동 가재골유적은 3개 지점으로 나뉘어 위치한다. 1지점의 위치는 용화마을 신도브래뉴아파트단지가 조성된 자리에 해당하며, 2지점은 아산용화엘크루아파트단지와 서쪽의 택지개발 지역에 해당한다. 3지점의 위치는 온양힐스테이트아파트 남동쪽으로 연접하는 택지개발 지역에 해당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용화동 가재골유적의 발굴 조사는 아산시에서 시행한 용화지구 도시개발사업에 따른 구제(救濟) 조사[대규모 공사나 개발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조사]로 진행되었다. 사업부지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는 충청문화재연구원에서 진행하였다. 지표조사는 2004년 진행되었는데, 나말여초(羅末麗初) 및 조선시대 유물이 산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사업범위 외곽의 동일 구릉지에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인 풍기동유적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어 3개 지점과 곡저부(谷底部)[골짜기의 바닥 부분] 일대에 대한 시굴 조사 의견이 개진되었다. 시굴 조사는 2005년 진행되었으며, 녹지 보존지구[3지점 남쪽 일대]로 설정된 지역은 조사에서 제외되었다. 시굴 조사 결과 3개 지점 모두 청동기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발굴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발굴 조사는 보상 문제로 인해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조사는 1, 2지점을 대상으로 2006년 4월 13일부터 2007년 2월 24일까지 진행되었으며, 3지점에 대한 2차 조사는 2007년 11월 19일부터 2008년 3월 14일까지 진행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1지점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1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31기와 움집 21기, 조선시대 널무덤 8기, 시대 미상 돌덧널무덤 2기가 확인되었다. 2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3기, 통일신라시대 돌덧널무덤 2기, 조선시대 주거지 4기와 널무덤 3기, 시대 미상의 가마와 불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 시설[소성유구(燒成遺構)] 등이 확인되었다. 3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3기, 원삼국시대~백제시대 숯가마 1기, 조선시대 움집 1기, 시대 미상의 돌덧널무덤 1기와 움집 6기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서 조선시대 백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다양한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장 높은 빈도와 다양한 구성을 보이는 것은 청동기시대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다양한 기종의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구멍무늬가 새겨진 토기가 특징적이다. 석기의 형태와 구성을 토대로 당시의 생계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용화동 가재골유적에서는 반달돌칼, 자귀[주상편인석부(柱狀片刃石斧)], 이단경식(二段莖式)[자루에 끼우는 부분이 2단으로 된 것] 돌살촉, 양면날 돌도끼 및 간돌검, 간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현재 용화동 가재골유적 자리에는 용화지구 도시개발사업이 완료되어 유적은 사라지고 도시화가 완료된 상태이며, 조사 내용은 2009년 발간된 발굴 조사 보고서에 기록·보존되었다.
[의의와 평가]
용화동 가재골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 후엽 시기에 조성된 대규모 마을 유적으로 직사각형 또는 가늘고 긴 직사각형 평면 형태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던 옥외 시설물인 구덩이 등이 다수 확인되었다. 주거의 배치와 움집의 군집 양상을 토대로 당시 마을의 사회구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구성을 보이는 출토 유물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