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558 |
---|---|
한자 | 牙山李忠武公遺墟 |
영어공식명칭 | 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Asan |
이칭/별칭 | 현충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백암리 10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선명 |
건립 시기/일시 | 1706년 - 현충사 건립 |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현충사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2년 - 현충사 중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7년 3월 18일 - 현충사 일원을 ‘아산 이충무공 유허’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155호 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7년 - 현충사 팔작지붕 한옥 형태의 철근콘크리트로 신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8년 - 구 현충사[1932년 중건 현충사] 현재 위치로 이전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07년 - 현충사(顯忠祠) 숙종이 사액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재지정 |
현 소재지 | 아산 이충무공 유허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백암리 100] |
원소재지 | 현충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438-1번지 |
성격 | 사적 |
양식 | 팔작지붕 한옥 형태의 철근콘크리트 건축[현충사]|맞배지붕[구 현충사] |
정면 칸수 | 5칸[현충사]|3칸[구 현충사] |
측면 칸수 | 3칸[현충사]|2칸[구 현충사] |
소유자 | 문화재청 |
관리자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이순신 관련 조선시대 사적.
[개설]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李忠武公遺墟)는 흔히 ‘현충사’라 통칭하기도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顯忠祠)를 중심으로 이순신이 혼인 후 살던 옛집, 활터, 이면공 묘소, 구 현충사, 정려,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등 141만 5331㎡[16만 3096평]에 달하는 경역 전체를 가리킨다. 1967년 3월 18일에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아산 이충무공 유허는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48, 현충사길 126 등에 자리 잡고 있다. 아산시 중심 지역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4㎞ 지점으로, 곡교천 북쪽이며 방화산 남쪽의 넓은 지역에 해당한다.
[변천]
현충사는 이순신이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순절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04년(숙종 30)에 아산현 유생을 시작으로 충청도 유생들이 조정에 사당 건립을 상소하여 2년 후인 1706년(숙종 32)에 사당이 완공되었으며,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에 숙종이 ‘현충사’라 사액하였다. 당시 현충사는 현재 위치의 서편에 있는 충무교육원 교원 숙소 자리에 세워졌다. 그 뒤 1726년(영조 2) 강민공(剛愍公) 이완(李莞)을 추가 배향하고 1732년에 이순신의 5대손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을 추배하고 제향을 이어오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고종 42) 2월 아산 지역의 유림들이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옛터에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13대 종손인 이종옥(李種玉)이 독립운동 지원 등으로 자금이 부족하여 은행에서 대출하며 담보로 잡힌 이순신 묘소 임야와 위토, 고택 등이 경매에 붙여진다는 소식이 1931년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성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결성된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종손의 빚을 청산하고 이어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새로운 현충사 사당을 현재의 위치 바로 아래에 중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1932년에 봉안된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 그린 영정이 퇴색하여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영정을 봉안하였다. 1953년에는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영정을 새로 봉안하였는데 이후 1973년 10월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 의장 박정희의 지시로 1962년에 충청남도지사 윤태호가 이충무공기념사업회장으로 임명되어 4,438㎡였던 현충사의 경역 면적을 1만 7684㎡로 확장하고 유물관을 건립하였다. 1963년부터 이른바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국가 주도로 시작되어 1967년에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금의 현충사를 준공하였다. 이때부터 현충사에는 강민공 이완과 충민공 이봉상을 제외하고 충무공 이순신만을 단독 배향하였으며, 1932년에 중건한 구 현충사 건물은 1968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더불어 141만 5331㎡로 크게 확장한 경역에 내삼문, 홍살문, 정려, 정문, 고택, 충무정, 활터, 유물전시관, 정원, 연못, 그 외의 부대시설 등을 완공하여 아산 이충무공 유허를 완전히 성역화하고, 1969년 4월 28일에 이충무공 제422회 탄신 기념 및 성역화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2011년 4월에는 유물관을 대신하는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준공 개관하였다.
[현황]
아산 이충무공 유허에는 사당인 현충사와 구 현충사, 이충무공 옛집[고택], 충무공이순신기념관, 정려, 충무문, 홍살문, 충무정, 활터, 이면공 묘소 등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충사는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67년에 준공된 최초의 한옥형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사용하였으며 공포는 다포식, 기둥은 배흘림기둥을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에 전퇴칸이 있는 내부 열 칸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금모루 단청, 외부는 모루 단청을 하였으며 바닥에는 방전(方磚)을 깔았다. 담장은 사괴석(四塊石)으로 벽을 쌓고 기와지붕으로 얹은 돌담으로 곡담 또는 곡장이라 한다. 마루와 문짝, 닫집 이외에는 콘크리트로 건축되었다. 매년 4월 28일 이충무공 탄신 기념 다례행제가 열린다.
구 현충사는 1932년 중건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전통 목조 건축물이다.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새 현충사가 지어지면서 배전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 현충사의 ‘현충사’ 현판은 1707년 숙종이 사액서원으로 지정하고 내려준 것이다.
이충무공 옛집은 이순신이 21세 때에 전 보성군수 방진의 무남독녀 상주방씨와 혼인하면서 처갓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의 본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안채, 문간채, 작은 문간채, 사랑채, 가묘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성역화 당시 조금 변형되었다.
정려에는 정조가 하사한 이충무공과 공의 조카 이완, 4대손 이홍무, 5대손 이봉상 등 네 명의 충신과 8대손 이제빈의 효자 명정 편액이 걸려 있다. 원래는 좌향이 동남향이었으나 현충사 성역화 때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밖에 옛집 대문 옆에 있는 우물을 후세 사람들이 ‘충무정’이라고 불렀는데 ‘정(井)’ 자 모양으로 정비하였다. 활터는 옛집 옆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곳으로 이순신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동쪽에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가 있고, 활터와 이면공 묘소 사이 북쪽 산기슭에는 방진 부부의 묘소가 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외벽과 지붕을 잔디로 덮어 반원형으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1층의 건축물이며, 이충무공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를 수집하고, 이를 전시·교육하기 위한 역사 테마관,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산 이충무공 유허는 지속적인 개보수 작업과 관리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참배객과 관람객을 포함하여 연간 100만여 명이 찾고 있다.
[의의와 평가]
아산 이충무공 유허는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출사하기 전 살았던 옛집과 추숭을 위해 건립된 사당 현충사 등이 있는 이순신 관련 최대의 사적으로 이순신의 정신과 위업을 공감하고 선양할 수 있는 역사적, 교육적 유적으로 의미가 매우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