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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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怡 |
영어음역 | Nam Yi |
이칭/별칭 | 의산군(宜山君),충무公(忠武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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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
성별 | 남 |
생년 | 1441년 |
몰년 | 1468년 |
본관 | 의령 |
대표관직 | 병조판서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태종의 부마(駙馬) 남휘(南暉)와 정선공주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남빈(南份),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부인은 태종의 외손인 좌의정 권람(權擥)의 4녀이다.
[활동사항]
1457년(세조 3)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이를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변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워 이른 나이인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건주위를 정벌하고 개선하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가 만산경(萬山景)을 굽어보면서 읊은 시(詩)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대궐 안에 숙직하던 어느 날 밤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고 하였는데, 유자광이 이것을 엿듣고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정적이었던 유자광이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이라고 고쳐서 보고하였던 것이다.
[저술 및 작품]
남이가 만산경을 굽어보면서 읊은 시를 보면,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했으며,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잦았도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태평하게 하지 못하면 뒷날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白頭山石磨刀盡 頭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 하였다.
[묘소]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