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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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 |
영어의미역 | Loyalist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충청북도 음성 지역에서 전통시대에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을 실천한 신하.
[개설]
충신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의 육정(六正) 가운데 하나이다. 음성 지역에도 충과 관련된 인물과 유적이 상당수 남아 있어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았던 충 사상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음성 지역의 충신에 관한 기록으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이 있다. 또 관련된 유적으로 여러 개의 충신문이 있다. 홍문(紅門) 또는 작계(綽契)라고도 하는 충신문은 국가에서 충신을 포함하여 효자와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그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색으로 단장한 문인데, 박순·권길·이구령·장충범·김종립·남연년 등의 충신문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충신]
음성 지역에서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충신 유적으로는 조선 태종 대의 인물인 박순(朴淳)[?~1402]의 유적이 있다. 박순은 1402년(태종 2)에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지원하여 태조 이성계의 환궁을 약속받고 돌아오던 길에 화를 당했던 인물이다. 그로 인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증직되고 숙종 때에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 같은 박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충신문이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다.
선조 대의 인물로는 권길(權吉)과 이구령(李龜齡)[?~1592] 그리고 장충범(張忠範)[?~1597]이 있다. 권길은 권근(權近)의 7세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성주판관으로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권길은 죽음을 다하여 싸울 각오로 옷을 벗어서 피로 이름을 쓰고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전한다. 권길의 충신문은 소이면 갑산리에 있다.
이구령은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홍주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의 의병군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구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장충범은 단양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부상하여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로 피신하였다. 이후 삼생리에서 의병을 모아 지금의 삼생리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장충범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605년(선조 38)에 녹권(錄券)이 하사되었고, 1857년(철종 8)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장충범의 충신문은 음성읍 삼생리에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충신]
병자호란 때의 인물로 김종립(金宗立)[?~1636]이 있다. 김종립은 1624년에 무과에 급제한 인물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광주(廣州) 험천(險川)에서 충청도관찰사 정세규의 군사와 합세하여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숙종 대에 김종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고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김종립의 충신문은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있다.
영조 대의 인물로 남연년(南延年)[1653~1728]이 있다. 남연년은 음성 원남면 상노리에서 출생한 인물로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772년(영조 3)에 청주영장이 되었는데 이듬해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하다 전사하였다. 그 공로로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장(忠壯)이라 시호를 받았다.남연년의 충신문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음성 지역에서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진 인물들은 국가 위기 때에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절을 지켰고, 국가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관직을 증직하고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