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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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亭里陽村-慶州李氏世居地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민식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경주 이씨 세거지.
[명칭유래]
용정리가 속한 초평면은 조선 말 31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정면(山井面)의 3개리와 문방면(文方面)의 오경리를 편입하고, 삼티리를 음성군 원남면에 넘겨 모두 5개리로 개편되었다. 그 후 덕산면 오갑리, 문백면 연담리, 청원군 북이면의 4개리를 편입하여 11개리가 되었다.
용정리는 1914년 양촌리(陽村里)·지전리(芝田里)·부창리(夫昌里)·생석리(生石里)·연촌리(蓮村里)를 병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양촌은 용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초평천(草坪川) 변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명종 대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인 이대건과 이대건의 아들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시득이 제천에서 청주 오근장으로 이거하였다가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은 이래 후손들이 400년간 세거해 오고 있다.
이시발은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경상감사를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서 전후 복구에 힘썼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한때 고향인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로 낙향하였고, 1618년(광해군 10) 다시 탄핵을 받자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626년(인조 4) 남한산성 수축을 감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초평면 용정리 지전마을에 있는 아버지 이대건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시발의 둘째 아들 이경휘(李慶徽)[1617~1669]는 1644년(인조 22)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시발의 셋째 아들 이경억(李慶億)[1620~1673]은 164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672년(현종 13)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다.
이시발의 넷째 아들 이경충(李慶忠)은 무과에 급제한 뒤 아버지 이시발을 도와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이등공신이 되었고 찰방을 지냈다. 이시발의 다섯째 아들 이경선(李慶善)[1599~1636]은 1632년(인조 10)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다 광주 검천(檢川)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경휘의 아들로 큰아버지 이경연(李慶衍)에게 출계한 이인환(李寅煥)[1633~1699]은 1665년(현종 6) 문과에 급제한 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미움을 사 외직을 전전하다가 1679년(숙종 5)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다시 기용되었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이후 고향에 은거하였다가 1694년(숙종 20) 다시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인환의 아우 이인혁(李寅爀)[1634~1701]은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형과 함께 진퇴를 거듭하였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 61세에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은 1708년(숙종 3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는 데 힘을 기울였다. 1718년경 장서 10,000여 권을 모아 완위각(宛委閣)이라는 서재를 열었다. 완위각은 달리 만권루(萬卷樓)라고도 하는데, 20세기 초까지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 연구에 정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학산(學山) 정인표(鄭寅杓),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은 초평면 금곡리에 거주하며 완위각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자연환경]
음성군 원남면에 있는 원남지에서 흘러내린 초평천이 굽이쳐 평야를 만들고 초평저수지로 흘러든다. 양촌마을은 초평천 북쪽 기슭 충적지에 자리 잡고 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초평천 좌우로 뻗어 있고, 남서쪽으로 트인 형국이다. 마을 동쪽에는 두타산(頭陀山)[598m]이 솟아 있고, 마을 주위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현황]
용정리 양촌마을은 초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국도 34호선을 따라가거나 초평천 건너 지전마을을 통하여 갈 수 있다. 2010년 2월 28일 현재 양촌마을에는 총 90가구에 205명[남자 104명, 여자 10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지전마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인 진천 이시발 신도비(李時發 神道碑)를 비롯하여 이대건 신도비(李大建 神道碑), 이대건·이시발·이경연·이인환의 묘소가 있다. 양촌마을 마을 입구 다리 북쪽에는 쌍오정 터가 있고 그 아래에 ‘청령대’ 각자가 있다. 마을 가운데에는 완위각 터가 있다. 이시발 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세운 것으로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정영(李正英)이 전(篆)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