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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132
한자 建築
영어의미역 Architectur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철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의 건물, 구조물 등을 쌓아 만드는 일 또는 사람이나 물품 등을 수용하기 위한 구축물.

[개설]

인간이 태어나서 평생을 머물다 마지막에 임하는 행위 모두가 건축물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인간 대부분은 평생을 낮에는 사무실에서 밤에는 주택에서 머문다. 이 모든 곳이 건축물이다.

예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불리는 진천은 충청북도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시대에 금물노군(今勿奴郡)이었고, 신라시대에는 흑양군(黑壤郡)·황양군(黃壤郡)이었다.

고려 전기에 강주(降州)라 하였다가 진주(鎭州)로 개칭하였다. 성종 때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 때 파하였고, 현종(顯宗) 때는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고종창의현(彰義縣)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가 원종의령군(義寧郡)으로 고치고 군사(軍事)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상산(常山)으로 고치고 그 후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 진천으로 개칭하여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 일시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되었고,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현감 대신 군수를 두었다.

현대 들어 진천군은 농공이 함께하는 내륙 도시로 반경 40㎞ 안에 청주·음성·괴산·안성, 천안 등이 있고,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여 교통의 편리성을 갖추어 서울에서 1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산악이 많고, 동북부는 금강(錦江) 상류인 미호천(美湖川)광혜원면백곡면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광활한 평야로 흘러들어 비옥한 곡창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건축]

고려 전기에 축조되어 지금까지 이용하고 있는 진천 농다리[일명 진천 농교]는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洗錦川)에 놓인 아름다운 돌다리[石橋]이다. 1932년 발간된 『상산지(常山誌)』에 따르면 고려 전기에 임연 장군이 축조하였다고 한다. 본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93m이다.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뒤 상판석을 얹었다.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을 쓰지 않고 돌만을 이용하여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교각의 너비는 대체로 4~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너비와 두께가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엿보인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은 특별히 선별한 듯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건축]

진천 지역의 조선시대 건축물로는 조선 태조 때 건립된 진천향교가 있다. 대성전, 명륜당, 문묘인 동무와 서무로 이루어져 있다. 역대 현감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 여러 차례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 지방의 유지 최흡이 사재를 들여 앞면 6칸 옆면 2칸의 풍화루를 세워 지금의 향교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 태조진천현 관아 남쪽 2리인 교성리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교육기관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재정비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는 1850년경 신헌(申櫶)이 건립하여 거처하던 진천 신헌 고가가 있다. 1850년대 지방의 전통 가옥의 구조를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건립 당시에는 ‘ㄱ’자형으로 된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중문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사랑채와 안채 등은 1920년대에 해체되어 진천 길상사를 다시 짓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ㄱ’자형의 안채는 동남쪽으로는 중문과 광채가 있고 나머지는 막돌로 쌓은 담장이 장방형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구조로,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네모난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오른쪽은 맞배지붕, 왼쪽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근대의 건축]

근대 건축물로는 1908년 세운 대한성공회 진천성당이 있다. 진천성당은 한옥의 구조를 갖추면서 서구적인 형태로 지어진 건축물로 청주성당의 모델이 되었다. 근대 초기 전통 건축과 서양 건축의 융합 형식을 보여 주는 건축사적 의의를 지닌 중요한 건축물이다.

그 밖에 1930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사용 중인 세왕주조 양조장이 있다. 양조장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벽체에 잘 나타나 있다. 벽체는 수수깡을 엮어 흙을 바른 다음 나무판을 대어 마무리하였고 흙벽과 나무판 사이에 왕겨를 채워 넣었다. 전통주의 발효 공간인 천장에도 왕겨를 넣어 생산 시설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현대의 건축]

현대 건축물로는 진천 지역의 관광 명소가 된 보탑사(寶塔寺)를 들 수 있다. 보탑사가 자리 잡고 있는 진천읍 연곡리상계리는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지대이다. 상계리 계양마을 담안밭에 흥무대왕 김유신(金庾信)의 탄생지가 있고, 태령산(胎靈山) 꼭대기에는 김유신의 태실이 있다. 태실 주위에는 동쪽으로 경사면을 에워싸며 쌓은 석축 산성인 태령산성이 있다.

보탑사가 세워진 연곡리 절터에서는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404호인 진천 연곡리 석비[일명 백비]를 비롯하여 연곡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연곡리 삼층석탑이 발견되었다. 특히 석비는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정화하여 비각을 세우고 보탑사 경내에 보존하고 있다.

보탑사를 세우기 위해 1991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였고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독 아래 1992년 5월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삼층목탑을 완공하였다. 1층에는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셨고 2층에는 경전, 3층에는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의 법문을 다보여래가 증명하고 찬탄하기 위하여 칠보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보배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의 가르침을 심어 주는 자비심이 가득 차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보탑사라고 이름 지었다. 전체 넓이 약 13,223.14㎡, 총면적 561.98㎡이며, 탑의 높이는 54m이다. 주지는 지광 우위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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