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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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음역 | Goryeo sidae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유호석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의 고려 태조부터 왕조 말까지의 역사.
[개설]
고려시대 남원은 남원부(南原府)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남원부는 고려 건국 초에는 강남도에 소속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는 강남도와 해양도가 합하여 전라도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남원부 역시 여기에 소속되었다. 남원부는 또 용성(龍城)이라고도 하였다.
[지방 행정구역의 변천]
남원 지역은 통일신라 이래 5소경(小京)의 하나로, 지방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940년(태조 23) 3월에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칠 때 남원은 소경에서 남원부(南原府)로 격하되었다.
그 뒤에 983년(성종 2)에 이르러 전주(全州)를 포함하여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지방에 상주하는 관리가 조정에서 파견되어 지방의 호족세력에 대한 정부 통제가 본격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995년(성종 14)에는 전국을 10도로 개편하였는데, 이 때 남원부는 강남도에 소속되었다. 성종 때부터 시작된 지방 제도의 정비는 목종(穆宗)을 거쳐 현종(顯宗)에 이르러 골격을 갖추게 된다.
1018년(현종 9)에 4도호(都護), 8목(牧), 15부(府),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이 설치되어, 지방 제도는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다. 고려의 기본적인 군현제(郡縣制)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가 1018년 이후의 지방 제도를 기준으로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이제 중앙의 행정력이 비로소 군·현의 행정단위에까지 직접 침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종 9년에 완성된 지방관제는 고려의 지방관제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는 점에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지방 행정구역 개혁에서는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전라도라는 명칭이 나타났다. 15부의 하나인 남원부는 이 전라도에 소속되었고, 전라도의 관할인 2목 2부 18군 32현 가운데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아 전라도의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원부는 그 뒤 1310년(충선왕 2)에 이르러 대방군(帶方郡)으로 명칭이 격하되었다. 남원 출신의 역모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1360년(공민왕 9)에 다시 남원부로 승격되어 조선시대로 넘어왔다.
[속군과 속현]
고려시대의 남원부는 2군 7현의 속군과 속현을 두었다. 임실군(任實郡)·순창군(淳昌郡)·장계현(長溪縣)·적성현(赤城縣)·거령현(居寧縣)·구고현(九皐縣)·장수현(長水縣)·운봉현(雲峯縣)·구례현(求禮縣)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를 통해 이들 속군과 속현의 변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임실군 : 원래 백제의 임실군으로 신라에서도 그대로 두었으며, 고려에 와서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그 뒤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순창군 : 원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와서 순창현으로 고쳐 남원부에 소속시켰고,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었다. 그 뒤 충숙왕 원년에 순창이 승려 국통(國統) 정오(丁午)의 고향이라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 장계현 : 원래 백제의 백해군(伯海郡)으로 신라 경덕왕이 벽계군(壁溪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와서 장계현으로 고쳐 남원부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장수현(長水縣)에 이속(移屬)하였다.
○ 적성현 : 원래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적성현으로 고쳐 순화군(淳化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남원부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순창군(淳昌郡)에 다시 소속시켰다.
○ 거령현 : 원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청웅(靑雄)으로 고쳐 임실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에 와서 거령현으로 이름을 고쳐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 구고현 : 원래 백제의 돌평현(堗坪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구고현으로 이름을 고쳐 순화군의 영현으로 삼았으며, 고려 초에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1354년(공민왕 3)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 장수현 : 원래 백제의 양평현(兩坪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고택(高澤)으로 고쳐 벽계군(壁溪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 장수현으로 이름을 고쳐 남원부에 소속시켰으며 1392년(공양왕 3)에 장계(長溪)를 겸임하였다.
○ 운봉현 : 원래 신라의 모산현(母山縣)으로 경덕왕이 운봉현으로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 남원부에 소속시켰다.
○ 구례현 : 원래 백제의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신라 경덕왕이 구례현으로 고쳐 곡성군(谷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와서 남원부에 소속시켰으며, 1143년(인종 21)에 감무를 두었다.
[무인난 직후의 농민 봉기]
고려 의종 때 무인난이 일어난 뒤 무인정권이 들어섰지만 이후 명종·신종 때의 30여 년에 걸쳐서 전국 각 지역에서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극심하게 일어났다. 피지배층의 봉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해졌다는 점에 있었다.
문신정권 이래 심화되어온 지배계층의 토지 침탈은 무인정권에 들어와서 침탈의 주체가 문신에서 무인으로 바뀌었을 뿐, 오히려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지방관리들의 수탈 또한 극심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봉기하며 나섰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적으로 볼 때 북쪽에서는 변방인 북계(北界) 지역에서, 남쪽으로는 공주와 옥천 및 전주 지역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가운데 1176년(명종 6) 정월에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은 거의 1년 반을 지속하였을 만큼 끈질기고 대규모로 일어났다. 이곳 남원 지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고려사』에 직접적인 관련 사료가 나오지는 않지만, 족보와 야사를 통해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무인정권 초기인 신종 초에 남원에서 복기남(卜奇男)이라는 인물이 봉기를 주도하였는데, 당시 군수가 이를 진압하지 못하고 때마침 안렴사(按廉使)로 호남에 내려온 윤위(尹威)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다.
윤위는 단기(單騎)로 적도(賊徒)를 해산시키고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으며, 그 후손들이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 분관(分貫)하여 남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윤위는 오늘날의 남원윤씨의 시조가 되었다. 비록 정사(正史)에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곳 남원도 당시 역사의 회오리 바람을 비켜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
고려 말 왜구는 전국 곳곳의 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빈번하게 쳐들어와서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지역적으로 볼 때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가 가장 심하였으며, 경기도·황해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약탈을 당하였다.
특히 삼남 지방의 연해안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왜구의 침입이 횡행하였으며, 서울 개경에 가까운 지역 강화 등지까지 자주 출몰하였다. 1375년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1380년의 진포대첩(鎭浦大捷), 황산대첩(荒山大捷)은 왜구의 기세를 크게 꺾은 3대 대첩으로 유명하다.
이 중 황산대첩은 진포의 전투와 연이어진 것이다. 이미 진포에서 패퇴당한 왜구들은 내륙으로 달아나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지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정부는 이성계(李成桂)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로,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또 왕복명·우인열·박임종·홍인계·임성미·이원계 등을 원수(元帥)로 삼아 이성계의 지휘 아래 왜구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서게 했다. 이들 지휘부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가 그 곳에 있던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운봉을 지나 황산의 서북쪽에서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섬멸하였다.
황산전투는 10배에 가까운 적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거의 전멸하였고, 불과 70여 명의 적들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갈 정도로 완전한 승리였다. 이 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지는 당시 그 곳 냇가의 흐르는 물이 모두 붉게 물들어 일주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하여 왜구의 세력은 차츰 시들어갔으며, 1398년(공양왕 1) 박위(朴葳)의 대마도 정벌을 거치면서 더 이상 왜구의 대규모 침입은 겪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성계 등 신흥 군부세력은 황산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확고한 세력 기반을 구축하여, 뒷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승전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 10)에 이르러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를 새겨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있는 이 대첩비는 1945년 1월 일제에 의해 폭파되었다가 1973년에 다시 세워졌다.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지]
고려시대 남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불교유물 또는 유적지가 대부분이다. 우선 보물 제30호로 지정된 만복사지 5층석탑(1963. 1. 21)이 있다.
남원시 왕정동 481에 위치한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고려 석탑이다. 다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넣은 점이 특이하다. 현재는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보물 제31호로 지정된 만복사지 석좌(1963. 1. 21)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보인다. 높이 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전체를 조각했는데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보물 제32호로 지정된 만복사지 당간지주(1963. 1. 21)는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깃발의 깃대를 받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이다. 기둥에는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다.
이 당간지주는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긴다. 흙에 묻힌 받침부를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5m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처럼 큰 당간지주를 보면, 만복사의 원래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물 제43호로 지정된 만복사지 석불입상(1963. 1. 21)은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부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광배 뒷면에는 부처의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해놓았다.
보물 제422호로 지정된 선원사 철조여래좌상(1965. 7. 16)은 높이 1.2m, 무릎 폭 90㎝의 철불이다. 타원형 얼굴에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코, 꽉 다문 입술 등에서 고려시대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단, 손은 근래에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보물 제423호로 지정된 신계리 마애여래좌상(1965. 7. 16)은 도선스님이 하룻밤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불상이다. 자연 암석의 한 면을 다듬어 거기에 부처의 앉은 모습을 돋을 새김한 마애불로, 뚜렷한 입체감과 생동감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이밖에 사적지로는 앞에서 언급한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 : 1963. 1. 21)가 있는데,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로 만들어 세웠다.
그밖에 경내에 많은 국가지정 문화재들이 있는 만복사지(사적 제349호 : 1991. 3. 29)가 있다. 문종[1046~1083] 때 처음 만복사를 세웠을 때에는 경내에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까지 존재했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한편 도지정 문화재로는 주천면 용담리의 용담사 7층 석탑, 주생면 지당리의 석불입상, 신촌동의 심경암 석불좌상, 송동면 세전리의 석불입상, 이백면 양가리의 여원치 마애불상, 산내면 대정리의 백장암 보살좌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