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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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榮熙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7월 15일 - 신영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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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신영희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신영희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신영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신영희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신영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내리 -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 |
거주|이주지 | 답내리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신영희(申榮熙)[1891~1919]는 1891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내리[현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내리]에서 출생하였고,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해당하는 양주군 화도면 월산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활동 사항]
신영희는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마을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화도면 월산리의 3·1운동은 화도면에 거주하던 이달용(李達鎔) 등의 주도 아래 비밀리에 추진되다가 1919년 3월 16일에 사전 발각되었고, 이때 이택하(李澤夏), 이재하(李載夏), 이승보(李承輔) 등 다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07년 설립된 월산교회와 배인학당에서 선교와 교육 양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김필규(金弼圭)[1874~1919]는 전열을 정비하여 1919년 3월 18일로 거사일을 다시 정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8일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와 답내리] 일대의 주민이 총궐기하여 면사무소가 있던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로 행진하였다. 신영희도 이틀 전 시위 계획이 발각됨에 따라 체포된 이재하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을 시작할 때 200여 명에 불과하였던 시위 군중은 어느새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에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탄압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신영희를 비롯하여 손복산(孫福山), 이달용,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중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 강선원(姜善遠), 윤준(尹俊), 김원석(金元石) 등 다수의 인사가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상훈과 추모]
3·1운동 만세 시위 현장에서 일제의 통치에 맹렬하게 저항하였던 신영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어서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월산교회와 남양주시 차원의 추모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동참한 신영희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에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신영희를 비롯하여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들을 추모하고자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