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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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達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도형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2월 3일 - 이달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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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달용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에서 3·1운동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달용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3·1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이달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이달용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달용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강천리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 321 |
거주|이주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활동지 | 화도면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이달용(李達鎔)[1889~1919]은 1889년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강청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 출신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를 포함한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1919년 3월 13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金弼奎)도 이인하(李麟夏), 이택하(李澤夏)와 함께 전국적인 만세 시위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필규 등은 3월 16일 월산교회에서 이달용을 비롯한 여러 마을 지도자와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보(李承輔), 이재하(李載夏), 이택하 3명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러자 1919년 3월 18일 이달용의 주도 아래 양주군 화도면 답내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의 구영식(具永植)·권은(權慇), 화도면 월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의 김필규·강선원(姜善遠)·김원석(金元石)·이승면(李承冕)·남궁우룡(南宮又龍)·윤준(尹俊)·이윤원(李允遠) 등 주민 200여 명이 면사무소가 있는 화도면 마석우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 참여 인원이 가장 불어난 새벽 시점에는 1,000여 명에 달하는 등 급격하게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고 분위기도 격앙되었다.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총에 맞은 이달용, 손복산(孫福山), 신영희(申榮熙), 유상규(兪相奎), 이교직(李敎稙) 등 5명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원대현(元大鉉), 강덕여(姜德汝), 윤균(尹均), 윤정석(尹丁石), 이재혁(李載赫)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19년 3월 19일 새벽에는 김필규를 비롯하여 강선원, 윤준, 김원석 등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수사와 재판을 겪으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달용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더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월산교회 앞마당에 화도면 월산리 3·1운동에 참여한 이달용 등의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3년에 설립한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99번지에도 이달용을 비롯하여 당시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추모하고자 3·1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