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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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于山國 征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이사부가 동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우산국, 즉 울릉도와 부속 섬을 복속시킨 사건.
[개설]
신라의 동해 제해권 확보에서 중요한 사건은 지증왕 대의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이다. 신라는 울진, 삼척, 강릉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육상 교통로를 통한 진출뿐만 아니라 석탈해 이래 유지되어 온 해양 세력에 의한 연안 항로로의 양동(陽動)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삼척을 출발지로 하여 울릉도 정벌에 나섰고, 이를 통하여 동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법흥왕 대 이후 영토를 비약 확장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동해를 중심으로 막강한 해상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은 궤멸된 것이 아니라 신라와 함께함으로서 정치·경제 안정을 누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복속 과정과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산국 사람들은 거칠어서 꾀로 정복시킬 수밖에 없어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싣고 가서 맹수 사자를 풀어 죽인다고 위협하여 항복시켰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왕의 명을 받아 이찬 박이종이 나무 사자를 큰 배에 싣고 가서 위협하여 복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무 사자는 울릉도의 사자 바위가 되었고, 우산국의 왕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투구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사자는 신라 잡희인 오기(五伎)의 산예(狻猊), 곧 사자춤으로 재앙을 막음을 상징하는 짐승인 것으로 보인다.
나무 사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무 사자 발상은 해양 전술의 진취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사자 연희는 민속극에 두루 나타나듯 사자에게는 잡귀와 잡신을 쫒고 신성한 것을 지켜 낸다는 상징성이 있다. 이사부는 나무 사자 전술로 우산국을 제압하였다. 그동안 신라의 최정예 수륙 부대가 우산국의 해전 부대와 맞서 여러 번 패한 것이다. 이를 역전시킨 나무 사자 전선의 위용은 여러 측면에서 신무기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불을 뿜게 하거나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전술·전략을 수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척에서 출발한 배경]
삼척은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출항할 수 있는 각종 여건이 가장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자연 항구인 오십천(五十川) 하류 지역은 조선시대에 삼척포진(三陟浦鎭)이 육향산 밑자락으로 이전할 때까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당시 동해안에 있던 월송포, 울진포, 대포, 고성포를 관장하기 위하여 1898년(고종 35)에 폐지할 때까지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파견한 것으로 보아 동해안에서 가장 크고 좋은 자연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척포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성이 오화리산성(吳火里山城)이다. 오화리산성은 삼척시 오분동고성산에 있는 산성으로, 동해안에서 가장 긴 하천인 오십천 하구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하기 위하여 어디에서 출발하였을까?’라는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개진될 수 있겠지만 이사부가 하슬라(何瑟羅)[강릉] 군주로 있을 때 삼척의 오십천 하구에서 출항하여 우산국[울릉도]를 복속시켰으며, 조선시대에도 삼척부사와 관리가 울릉도를 관리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면 조선 후기 문신 허목(許穆)[1595~1682]의 『척주지(陟州誌)』에 실린 울릉도 관련 내용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국가 차원에서 삼척을 거점으로 울릉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기록]
1.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조 512년(지증 마립간 13) 여름 6월
우산국이 귀부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면적은 사방 100리이다.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다가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된 뒤 우산인들이 어리석고 사납기 때문에 위력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계략을 써서 복종시키기로 했다. 곧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거짓말로 이르기를 “너희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서 모두 짓밟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하였다.
2. 『삼국유사(三國遺事)』 지철로왕(智哲老王)[시호는 지증]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강릉)]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의 우릉(羽陵)]가 있었다. 섬 둘레는 2만 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며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평가와 의의]
신라는 경주의 지리상 위치가 동해 바닷가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에 대한 적절한 대응, 나아가 동해안 제해권 확보를 위한 노력에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해양 및 어로 문화의 기반을 수용한 신라는 동해안 지역으로의 진출에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서 지증왕대에 오면 삼척에 실직주(悉直州), 강릉에 하슬라주,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각각 설치하고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키게 함으로써 동해의 제해권과 동해안 지역을 확보하였다.
신라의 동해안 제해권 확보에서 중요한 사건은 지증왕대의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복속 사건이다. 지금까지 이 문제는 주로 독도의 영유권을 밝히는 문제에 집착하여 독도가 우리 영토로서 유구성을 입증하는 역사 자료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의 동해 제해권 확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지증왕 때의 동해안 진출, 즉 울진·삼척·강릉까지의 진출은 육상교통로를 통한 진출만이 아니라 암각화에서부터 석탈해 이래 유지되어 온 해양 세력에 의한 연안 항로로의 양동 작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을 확보한 신라는 울진·삼척 지역으로부터 선단을 발진시켜 울릉도 정벌에 나섰다. 이로써 신라는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후 법흥왕대의 사벌주(沙伐州) 군주 파견, 금관국 복속, 진흥왕대의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 확보,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 가야 정벌, 북한산비 및 함경남도 함주군 지역의 황초령비와 이원군의 마운령비 등 진흥왕 순수비 설치 같은 비약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영토 확장과 삼국 통일 과정에서 우산국과 동해안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동해안 지역의 경제력과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서해안 및 동해안을 통한 양동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는 우산국의 협조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우산국은 궤멸된 것이 아니라 점차 신라의 제해권 확보에 따른 안정을 반사이익으로 누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울릉도에는 우해왕과 우해왕비 풍미녀(豊美女) 설화를 비롯하여 사자 바위와 사자굴, 투구 바위와 국수 바위, 나팔봉, 비파산과 병풍 바위 전설이 후대로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