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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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59년(공민왕 8) - 김승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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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82년(선조 15) - 김오 출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38년(세종 20) - 김승로 사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62년(현종 3) - 김오 사망 |
본관 | 강릉김씨 - 강원도 강릉 |
입향지 | 김승로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느리골 |
세거|집성지 | 강릉김씨 송오공파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소정면 고등리|전동면 보덕리|전동면 석곡리|연서면 쌍류리 |
세거|집성지 | 강릉김씨 기은공파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쌍류리 |청라리 |
묘소|세장지 | 김승로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 |
묘소|세장지 | 열녀 나주나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
묘소|세장지 | 김오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
묘소|세장지 | 효자 김한정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쌍류리 |
묘소|세장지 | 효자 김종철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쌍류리 |
묘소|세장지 | 효자 김연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
묘소|세장지 | 김진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
묘소|세장지 | 재각 영모재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
성씨 시조 | 김주원 |
입향 시조 | 김승로|김오 |
[정의]
김주원을 시조로 하고 김승로와 김오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강릉김씨 송오공파(松塢公派)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승로가 고려가 멸망한 직후 전의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으로 입향하였다. 기은공파는 임진왜란 때 김오가 전란을 피해 외향(外鄕)인 연기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으로 이주하였다. 후손들은 전의면, 소정면, 전동면, 연서면 등에 세거하여 오고 있다.
[연원]
강릉김씨의 시조는 김알지의 21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이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또는 셋째 아들인 문왕(文王)]의 5세손이다. 혜공왕 대에 이찬(伊飡)으로 시중을 지냈고 선덕왕 대에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선덕왕의 족자(族子)[조카나 조카뻘 되는 사람]인 김주원이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나 김경신(金敬信)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김주원은 자신의 장원(莊園)이 있고 연결된 친족 세력이 있는 곳인 명주(溟州)[현 강원도 강릉] 지방으로 물러나 이를 기반으로 지방 귀족화하여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칭해졌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
세종특별자치시에 거주하는 강릉김씨는 송오공파와 기은공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송오공파의 파조 및 입향조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김승로(金承露)[1359~1438]이다. 김승로의 자는 천뢰(天賚), 호는 송오(松塢)이다. 아버지는 고려 후기 왜구 토벌에 공훈이 있는 충절공(忠節公) 김사혁(金斯革), 어머니는 군기시사(軍器寺事)를 지낸 김영리(金英利)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김승로의 부인은 안유(安裕)의 증손녀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김승로는 태학(太學)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가서는 헌사(憲司)의 형부(刑部)와 4개 주현(州縣)에서 벼슬을 지내면서 치적(治績)[잘 다스린 공적]이 많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있을 때 고려의 기운이 쇠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김휴(金休), 최호(崔浩), 원천석(元天錫), 서견(徐甄) 등과 함께 송악강사(松岳講舍)에서 강론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김승로는 고려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강론을 하던 김휴, 최호 등과 함께 관복을 찢어 동문 밖에 걸고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는 통곡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전의면 관정리 느리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 태종이 김승로의 청절(淸節)을 가상히 여겨서 김승로에게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除授)하고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승로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전의현의 부로곡(扶老谷)[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에 장사를 지냈다. 1439년에 우의정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고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충의(忠義)이다.
기은공파는 이곡(梨谷) 김천익(金天益)[1350~1444]의 8세손이며 모암 김덕숭의 7세손인 김오(金鰲)[1582~1662]를 각각 파조와 입향조로 한다. 김천익 계열의 강릉김씨 모암공파(慕菴公派)는 진천[상산]에 세거하여 오다가 장사랑 김임계(金林繼)에 이르러 충청도 노성(魯城)으로 이거(移居)하여 4~5대를 살았고 기은(岐隱) 김오에 이르러 세종특별자치시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김오의 세종특별자치시 입향 유래는 임진왜란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전해지며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김오의 어머니가 기계유씨(杞溪兪氏)인 점으로 미루어 김오는 외향으로 임진왜란의 화를 피해 옮겨 온 것으로 추측된다. 호인 기은은 ‘연기에 은거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현황]
강릉김씨 송오공파는 전의면 관정리, 소정면 고등리, 전동면 보덕리와 석곡리, 연서면 쌍류리 등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기은공파는 연서면 쌍류리와 청라리 등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강릉김씨 송오공파 유적은 전동면 청람리에 김승로 묘소가 있으며 전동면 보덕리에는 열녀 나주나씨 정려가 있다. 열녀 나주나씨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은공파 유적은 연서면 청라리에 김오 묘소, 기은정(岐隱亭), 제각 영모재, 김진수 묘소, 효자 김연 정려 등이 있다. 효자 김연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서면 쌍류리에 있는 효자 김한정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자 김종철 정려도 연서면 쌍류리에 있으며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