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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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彦信 |
영어공식명칭 | Gim Eons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몰년 시기/일시 | 1636년 12월 - 김언신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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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김언신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아미산 아래 노리미 |
묘소|단소 | 김언신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고정 |
성격 | 입향조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만호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경주김씨 상촌공파의 입향조.
[개설]
김언신(金彦信)은 연동면 노송리 경주김씨 상촌공파의 입향조로 1624년 이괄의 난 때 공(功)을 세워 공신으로 책봉(冊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두 아들과 함께 싸우다가 순절(殉節)[충절이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하였다.
[가계]
연동면 노송리 경주김씨 상촌공파는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자수를 파조로 하고 있으며,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1세손인 김언신이다.
김언신의 아버지는 김우(金瑀)이며, 어머니는 교하노씨이다. 부인은 성산배씨 배언량(裵彦良)의 딸이자 배천의(裵天義)의 누이이다.
김언신은 아버지 김우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자 어머니 교하노씨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연동면 노송리 아미산 아래 노리미로 피란하였다.
노송리로 피란 온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때부터 아미산 남쪽 기슭을 피란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노송리는 후손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였고, 점점 번성하였다.
김언신의 아들 김응추(金應秋)·김응춘(金應春)은 병자호란 때 순절하였으며, 김언신 처 성산배씨와 김응추 처 밀양박씨가 효열로 이름이 나 있다.
성산배씨와 성산박씨 두 사람은 전사한 후 쌓인 시신 중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아 업고 돌아와 장사를 지낸 후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활동 사항]
김언신은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종사관이 되어 지금의 서울 아현동에서 싸워 공(功)으로 진무원공일등공신에 올랐다.
또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들 김응추·김응춘과 함께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위하러 출전하였다가 적군과 싸우다 순절(殉節)하였다.
인조는 김언신을 충의지사(忠義之士)라 칭하고 가선대부병조참판으로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하였으며, 남한산성 진외(陳外)에 비(碑)[묘비]를 세워 주었다. 현재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묘소]
김언신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고정에 있으며, 부인인 성산배씨와 합폄(合窆)[여러 시신을 한 무덤에 묻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