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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14
한자 慶州金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350년대 추정 - 김경의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00년대 후반 추정 - 김언신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00년대 초반 추정 - 김철원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696년(숙종 22) - 김병운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600년대 추정 - 김사상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67년(명종 22) - 김임생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37년(인조 15) - 김임생 사망
본관 경주김씨 본관 - 경상북도 경주시
입향지 경주김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대박리 지도보기|연동면 노송리지도보기|연동면 내판리지도보기|전동면 심중리지도보기|전동면 청람리지도보기|전동면 송곡리지도보기|전의면 다방리지도보기|연동면 응암리지도보기|부강면 부강리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경주김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노송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김경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 검암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김정일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 검암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김언신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김병운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김알지
입향 시조 김경의|김언신|김철원|김병운|김사상

[정의]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경주김씨는 태사공파, 판도판서공파, 장군공파, 학은공파 등 여러 계파가 입향하였다. 경주김씨 계파들은 금남면 대박리연동면 노송리·내판리·응암리, 전동면 심중리·청람리·송곡리, 전의면 다방리, 부강면 부강리 등지에 세거하여 왔다.

[연원]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하는 경주김씨는 후손들이 나뉘어서 각파(各派)를 형성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에는 고려시대 문인 김인관(金仁琯)을 1세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고려 후기 판도판서 김장유(金將有)를 1세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고려시대 무신 김순웅(金順雄)을 1세조로 하는 장군공파(將軍公派) 등의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고 있다.

[입향 경위]

경주김씨 태사공파는 김인관의 9세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자수(金自粹)의 후손들로, 금남면 대박리연동면 노송리에 세거하였다. 김자수의 후손들은 상촌공파(桑村公派)[김자수의 호가 상촌]라고도 불린다. 대박리 입향조는 김경의(金敬義)[1350년대 인물]로 전해지는데 충청북도 영동에서 살다가 대박리로 왔다 한다. 입향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동면 노송리 입향조는 김자수의 11세손인 김언신(金彦信)[1500년대 후반]이다. 김언신은 아버지 김우(金瑀)가 임진왜란 때 조헌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후 어머니 교하노씨가 남은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노송리 아미산 아래 노리미로 피란하면서 살게 되었다.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는 연동면 내판리에 세거하였다. 파조 김장유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충청북도 보은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서 삶]하여 생을 마쳤다. 후손 가운데에는 기묘명현 김정(金淨)도 있다. 내판리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는 인근의 청원군 현도면 시동리에서 이주하여 왔다.

경주김씨 장군공파는 김순웅의 13세손인 계림군 김균의 후손들로, 전동면 심중리·청람리·송곡리전의면 다방리연동면 응암리 등지에 세거하였다. 심중리 경주김씨 계림군파는 전의 운주산 아래 학당[미곡리 학당마을]에 묘가 있던 김춘무(金春茂)[1595~1676]의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는 자세하지 않지만 선대가 경기도 고양 일대에서 세거하다가 김춘무 또는 외아들 김석근[1624~1691]이 처가와의 연고로 인하여 입향한 것으로 추측된다.

청람리 입향조는 계림군의 7세손 김철원(金喆元)[1500년대 초반 인물]으로 알려져 있다. 김철원의 백조부인 김천령(金千齡)[1469~1503]이 1504년 갑자사화로 부관참시(部棺斬屍)[죽은 뒤에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던 일] 됨에 따라 일가족이 각처로 흩어졌다. 이를 계기로 김철원은 조부 김백령(金百齡)을 따라 전동면 청람리로 들어오게 되었다. 김철원의 묘소와 부친의 묘소가 전동면 청람리에 있으며, 여기에서 계림군 7세손 철원파[동막문중]가 시작된다. 김철원의 부친은 김백령의 3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김백령 묘소는 전동면에 있지 않고 김철원 부친의 이름은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었기에 후손들은 ‘철원파’라고 일컫는다.

응암리, 다방리 등지에는 계림군의 9세손인 송애(松厓) 김경여(金慶餘)[1596~1653]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김경여는 이귀(李貴)의 사위이자 김장생의 문인으로, 동문인 송시열·송준길·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병자호란 때 독전어사가 되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회덕으로 돌아가 생활하였다. 김경여는 1650년(효종 1)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후손들은 김경여의 호에서 유래한 송애공파라고 일컫는다. 송애공파 세종 지역 입향조는 김경여의 증손자인 김병운(金炳運)[1696~?]과 김사상[1600년대 중반]이다.

부강면 부강리 경주김씨 학은공파(鶴隱公派)는 김임생(金栣生)[1567~1637]의 후손들이다. 경주김씨 학은공파가 부강에 입향한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세언이 중종 기사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청주의 낭성으로 내려오면서 부강면과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세언 이전의 선대는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었는데, 김세언 이후 청주의 낭성면과 남일면 등지에 분포하다가 김세언의 고손인 김임생이 처음 부용면 외천리로 들어왔다. 외천리는 청주시 부용면 외천리였다가 2012년 7월 부용면 대부분이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으로 편입될 당시 외천리는 청주에 그대로 남아 있는 지역이다.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 관내 지역은 아니지만 부강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던 마을이므로 부강리경주김씨 입향조를 외천리에 처음 정착한 김임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임생의 11세손인 송암 김재식(金在植)[1860~1928]은 부강리의 만석지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황]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에 대박리경주김씨가 42가구 거주하는 동족마을, 내판리경주김씨가 27가구 거주하는 동족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관련 유적]

금남면 영대리 검암에는 김경의의 묘소와 묘비가 있고, 김자수의 후손으로 형조판서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된 김정일(金挺一)의 묘소가 있다. 연동면 응암리에는 입향조인 김언신의 묘소와 김병운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 공주에서 이장된 김경여의 묘소와 신도비 및 하마비, 재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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