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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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智傑 |
영어공식명칭 | Ryu Jige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601년(선조 34) - 류지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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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광해군 10) - 류지걸 출정 |
몰년 시기/일시 | 1619년(광해군 11) - 류지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96년(정조 20) - 류지걸 조봉대부호조좌랑에 증직되어 명정을 받음 |
묘소|단소 | 류지걸 단묘 - 충정남도 공주시 의당면 중흥리 궁골[구룡동] |
사당|배향지 | 충신 유지걸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송학리 253-3 |
성격 | 지사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관직 | 호조좌랑 |
[정의]
조선 후기 후금 정벌에 출정한 세종 지역 출신의 지사.
[개설]
류지걸(柳智傑)[1602~1619]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후금 정벌에 출정하여 순절하였다.
류지걸의 충절이 알려지면서 1796년(정조 20) 호조좌랑으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고, 증직(贈職)과 함께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았다.
[가계]
류지걸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아버지는 통제사 류형(柳珩)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이다.
류형은 전주이씨 사이에서 류충걸(柳忠傑)·류효걸(柳孝傑)·류신걸(柳信傑) 세 아들을 두었으며, 양천허씨 사이에서 류예걸(柳禮傑)·류제걸(柳悌傑)·류지걸(柳智傑)·류의걸(柳義傑) 네 아들을 두었다.
후일 세종 지역에 입향한 진주류씨 후손들은 크게 번창하면서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무반 가문으로서 성장·발전하였다.
류지걸의 후손들은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에 세거하였다. 후손들이 관직에 나아가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전주이씨·의령남씨·온양방씨 등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들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여 대를 이어 갔다.
[활동 사항]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의 지원 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의 막하(幕下)로 형 류효걸(柳孝傑)을 대신하여 종군(從軍)하였다.
류지걸은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강홍립이 군대를 데리고 투항하자 강홍립의 휘하에 있던 자들은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지만 끝까지 항복하기를 원하지 않고 백기(白旗) 아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훗날 강홍립은 귀국하여 류지걸의 형인 류효걸을 만나 “나는 지걸의 죄인이다.” 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묘소]
류지걸의 단묘(壇廟)[제당과 사당]가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중흥리 궁골[구룡동]에 조성되어 있다. 중흥리 궁골은 대교천의 상류로, 대교천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한 진주류씨가의 세거지 중 하나이다.
류형의 후손이 거주하면서 류지걸의 묘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1세손 류응호(柳應浩)가 주도하여 단을 조성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는 류지걸의 고향 충청남도 공주에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지어 충절을 표창하고 조봉대부(朝奉大夫) 호조좌랑에 증직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20년(1796) 8월 9일, 9월 15일, 11월 3일 기사에 증직과 정려를 내리는 과정이 자세하게 확인된다. 이처럼 류지걸 사후 170년이 지난 시기에 다시 정려를 내렸다는 것은 당시 진주류씨 가문의 위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충신 유지걸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송학리에 있으며,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정조조에 진주류씨들은 군영대장 등 고위직에 있음은 물론 중앙관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들의 추숭(追崇)[죽은 사람을 기리며 숭상함] 활동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