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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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李氏三孝旌閭 |
이칭/별칭 | 효자 이정환·이경설·이경익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 174-2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723년 - 전주이씨 삼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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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2012년 - 전주이씨 삼효 정려 현 위치로 이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전주이씨 삼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1호 지정 |
현 소재지 | 전주이씨 삼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 174-22 |
원소재지 | 전주이씨 삼효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원리 만자동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전주이씨 문중 |
관리자 | 전주이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1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에 있는 전주이씨3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전주이씨 삼효 정려는 전주이씨 집안의 이정환(李廷煥)[1604~1671]과 이정환의 손자 이경설(李景卨)[1650~1708]·이경익(李景益)[1655~1708]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정환은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한재(寒齋) 이목(李穆)[1471~1498]의 5대손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휘원(輝遠), 호는 송암(松岩)이다. 1633년(인조 11)에 생원이 되었으나 병자호란의 국치를 통분히 여겨 외출을 삼간 채 ‘비가(悲歌)’ 10수를 지었다. 효행 또한 남달라서 부모상을 당하자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죽으로 끼니를 이었으며,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시묘살이를 하는 효행 소문이 퍼졌다. 마침 1666년(현종 7) 현종이 온천에 거둥하다가 이정환의 효행 사실을 듣고 특별히 백미를 보내어 포상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명정을 받았으며, 1723년(경종 3)에 이세구(李世龜)가 행장(行狀)을 짓고 남구만(南九萬)이 묘표를 썼다.
이경설은 이정환의 장손이며, 자는 상우(相虞)이다. 이경익은 이경설의 동생이며, 자는 공거(公擧)이다. 이경설과 이경익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함께 자라면서 형은 아우 위하기를 내 몸같이 하고 아우 또한 형의 말이라면 어버이와 같이 받들어 섬겨서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경설이 18세, 이경익이 13세가 되던 해에 뜻밖의 모친상을 당하자 산소 옆에 초막(草幕)을 짓고 형제가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는데 마치 살아계신 분을 모시는 듯 하였고,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며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3년간 시묘하여 사람들이 이들을 쌍효자라 일컬었다. 그 뒤 부친에게 더욱 효도하였다. 비록 가세는 빈약하였으나 부친에게는 항상 하얀 쌀밥과 고기 반찬으로 봉양하였고, 아무리 눈보라가 쳐도 부친이 지내는 온돌방에는 훈훈한 열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형제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니 부친은 두 아들의 효성으로 75세까지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이경설·이경익 형제의 두터운 효행과 뜨거운 우애는 이웃 고을에까지 알려졌다. 이경설·이경익 형제는 1708년(숙종 34)에 함께 숨을 거두었다. 이경설은 58세, 이경익은 53세였다.
[위치]
장군면 소재지에서 대전 방향으로 가다가 이마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직진 후 금암리 송침삼거리에서 한국영상대학교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사덕골길을 따라 1.4㎞ 정도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서 도로 오른쪽에 자리한다. 정려는 전주이씨 묘역 입구에 있다.
[변천]
전주이씨 삼효 정려는 이정환이 1671년(현종 12)에 죽은 후 10년 만인 1681년(숙종 7)에 어사의 계(啓)에 의하여 명정을 받았다. 이정환의 아들 이기경(李基慶)도 효자였지만 특히 손자인 이경설과 이경익의 효행은 쌍둥이 효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이경설·이경익 형제는 1708년 같은 해에 죽었는데 이경설과 이경익 형제가 함께 명정을 받은 것은 죽기 전인 1699년(숙종 25)이었다. 이경설·이경익의 명정 사실은 예조에서 편찬한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 「효자정문질(孝子旌門秩)」에 공주에 거주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두 세대에 걸친 3인의 효행에 대한 포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경설·이경익 형제가 죽은 후 1723년(경종 3) 조부인 이정환과 함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같은 해 3월에 현존하는 정려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전주이씨 삼효 정려는 원래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원리 만자동 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금암리에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인해 2009년 11월 3일 연기군 남면 송원리[현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일대]에 있던 4대(이격, 이정환, 이기경, 이경설, 이경익)의 묘역을 이장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정려도 2012년 7월 18일 장군면 금암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형태]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화강암 석재를 가공한 8각의 높은 주초석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올렸으며, 아랫부분은 시멘트로 막아 놓았다. 정려의 4면은 홍살을 돌렸으며, 주변에는 낮은 담장을 돌려 보호시설을 설치했다.
[현황]
정려 내부에는 오른쪽에 이정환, 이경설, 이경익의 명정현판이 칸마다 게재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이정환의 명정현판[150×47㎝]이 게재되어 있으며, ‘孝子贈通德郞司憲府持平成均生員李廷煥之閭 崇禎紀元後五十四年辛酉七月日 命旌 後四十三年癸卯三月日 贈職’이라고 하여 명정과 증직 연대를 명확히 기재하였다. 가운데에는 이경설의 명정현판이 게재되어 있으며, ‘孝子贈通善郞司憲府持平李景卨之閭 崇禎紀元後七十二年己卯十月日 命旌後二十午年癸卯三月日贈職’이라고 하여 역시 명정과 증직 연대를 함께 기재하였다. 왼쪽에는 이경익의 명정현판이 게재되어 있으며, ‘孝子贈通善郞司憲府持平李景益之閭 崇禎紀元後七十二年己卯十月日 命旌後二十午年癸卯三月日贈職’이라고 하여 이경설과 함께 명정과 증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려 입구 정문에는 성구용(成九鏞)이 1969년에 지은 가로 135㎝, 세로 41㎝ 크기의 ‘全州李氏兩世三孝旌閭記’가 걸려 있다. 전주이씨 삼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주이씨 삼효 정려는 전주이씨 이정환과 그의 손자 이경설·이경익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이다. 효자 정려가 이정환이 죽은 지 10년 밖에 되지 않아 포장되거나 심지어 이경설·이경익 형제가 살아 있을 때 포장된 것은 당시 연기 지역 전주이씨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