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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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ism |
영어의미역 | Protestantism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ism |
이칭/별칭 | 신교,기독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명철 |
[정의]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분파
[한국의 개신교 전파 과정]
19세기 후반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회는 ‘장로교연합공의회’를 통해 교계예양협정(敎界禮讓協定)을 체결하여 미국 북장로회는 평안도, 캐나다장로회는 함경도, 호주장로회는 경상남도,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를 선교구역으로 선정한다. 이때 미국 남장로회는 순천을 비롯한 남부 지역을 선교지로 정한 후 개신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순천지역 개신교 수용사]
미국 미국 남장로회가 순천을 비롯한 남부 지역을 선교지로 정한 것은 이곳이 아직 미선교지라는 이유도 있지만, 선교사들의 출신지가 미국 남부지역이고 효율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기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순천을 산과 물이 기이하고 아름다워 소(小)강남이라고도 할 정도로 순천은 온화한 기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1894년 레이놀즈(W. D. Reynolds)[한국명 이눌서] 선교사가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호남지방을 답사하면서 미국 동남부 해안지방과 자연환경이 매우 유사하다는 기록을 하였다.
레이놀즈와 함께 드류(A. D. Drew)[한국명 유대모] 선교사는 1894년 3월 28일부터 약 45일간 호남 지역을 답사한다. 그들은 해로를 통해 군산에 도착한다. 다시 전주를 거쳐 김제, 정읍, 고창 등 호남 서부평야지대를 답사하고, 영광, 함평, 무안을 거쳐 1894년 4월 19일에 목포에 도착한다. 이후 진도, 완도, 고흥, 벌교를 거쳐 1894년 4월 30일 순천에 도착한다. 그들은 순천의 첫인상을 ‘비옥한 계곡 위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곳’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수와 남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후 기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간다.
선교사들이 호남 최초의 선교기지로 삼으려 한 곳은 나주다. 그러나 1897년 목포가 무역항으로 개항하면서 목포로 기지를 옮긴다.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벨(E. Bell)[한국명 배유지]과 오웬(C. C. Owen)[한국명 오원] 목사는 전남 내륙의 선교 필요성을 느끼고 새롭게 전남의 행정중심지로 부상한 광주에 관심을 둔다. 특히 프레스톤(J. F. Preston)[한국명 변요한] 목사는 목포에 비해서 문명의 편안함은 없어도 광주가 일하기 적합한 장소로 보고 광주에 선교기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1904년 선교사들은 선교연례회의에서 광주에 새로운 선교부를 신설한다.
순천을 포함한 남해지방은 원래 광주선교부 소속이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활동하던 벨과 오웬은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선교구역을 나누어서 광주 북부는 벨이 맡고 남부는 오웬이 맡기로 한다. 따라서 나주, 화순, 영암, 강진, 장흥, 보성, 고흥, 순천, 여수, 광양 지역은 오웬의 담당지가 된다. 그러나 1909년 오웬이 사망하면서 프레스톤과 코잇(R. T. Coit)[한국명 고라복]이 순천을 포함한 남해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된다. 특히 프레스톤은 순회전도 과정에서 순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광주와의 지리적 격차로 이 지역 선교가 용이하지 않아서 남해지방에 새로운 선교부의 신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1912년 당시 교통의 요지인 벌교와 미래의 교통 중심지가 될 순천을 두고 논의한 결과 마침내 순천이 새로운 선교거점으로 결정되었다.
1913년 전남지방에서 뒤늦게 생겨난 순천선교부는 코잇 목사 부부, 프라트(C. H. Pratt)[한국명 안체륜] 목사 부부, 의사인 티몬스(H. L. Timmons) 부부, 프레스톤 목사 부부를 포함하여 13명의 선교사가 상주하여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인다. 이들은 다시 선교구역을 나누어 코잇 부부는 광양과 구례를 담당하고, 프레스톤 부부는 순천과 곡성 그리고 구례를 담당하며, 프라트 부부는 고흥과 보성을 순회선교구역으로 삼았다. 이 구분은 현재 시찰지역의 지리적 경계의 기초가 되고 있다.
[순천의 선교사와 교회]
순천 지역 선교사 중 코잇 목사는 1909년 미국 미국 남장로회 내한 선교사로서 광주선교부에 소속되어 광주 숭일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코잇 목사는 순천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순천으로 이주해 1910년 프레스톤과 함께 현 순천시 금곡동 사숙에서 매산학교[매산중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를 개교하고, 1911년 4월에는 매산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코잇은 선교 첫해에 두 아들을 잃었음에도 순천은 물론 고흥과 보성 지역 선교에 전념하다 1932년 사망하였다. 그리고 전주병원에 근무하던 티몬스(H. L. Timmons)[한국명 김로라]는 1913년 순천진료소를 열어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15년 현대식 건물을 건축하고 알렉산더병원을 설립했다. 존스홉킨스병원 부설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툼(Miss, T. B. Thumm)[한국명 원대마] 선교사는 순천 알렉산더병원에서 의료선교사인 로저스(J. M. Rogers)[한국명 노재수]와 함께 한국인 간호사를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순천의 첫 교회는 1906년 이원근의 전도로 박응삼, 이원백, 차경순, 김경선, 이도삼 등이 신자가 되면서 설립된 낙안의 평촌교회다. 이후 1907년 지금의 순천중앙교회인 읍내교회가 설립된다. 1908년에는 순천 읍내교회에 출석하던 교인이 지금의 낙안중앙교회인 낙안읍교회를 설립한다.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송광면[1910], 주암면[1914], 해룡면[1915], 월등면[1932] 등 비교적 큰 마을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초창기 순천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의 특징은 가족이 집단적으로 교인이 되고, 친척이나 이웃 등을 통해서 인접 지역에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신사참배거부운동]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특히 순천을 주목할 만한 것은 일제강점기 순천노회의 수난 사건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 외에 순천노회에서는 1940년 17명의 개신교인이 옥고를 치렀다. 1940년 총회에 보고된 순천노회의 목사 14명 중에서 12명이 구속되었다.
[현황]
2018년도 문화체육관광부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개신교파는 총 374개다. 그러나 순천 지역에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하는 교파와 교회는 대략 다음과 같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순천중앙감리교회[순천시 조례동], 기독교 대한하나님의성회 순천순복음교회[순천시 해룡면], 기독교 대한성결교 한소망교회[순천시 장천동], 기독교 한국침례회 순천침례교회[순천시 연향동],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통합 순천중앙교회[순천시 매곡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순천강남중앙교회[순천시 연향동] 등이다. 여러 교파와 교회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에 소속된 교회와 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순천의 기독교인 비율은 2013년 이후 현재까지 약 40%로 비교적 높은 편이며 기독교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도 좋은 편이다. 이 중 규모가 가장 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경우 2017년 기준으로 470개 교회에 목사 743명, 정기적인 출석 교인 약 85,000명이 있다.
순천시와 시민들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 순천시 주관으로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2009년에 착공한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은 순천시 매산동에 건립되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전시실, 3층에는 선교 초기의 ‘ㄱ’자 교회를 복원한 미니 채플실이 있다. 지하 1층의 1전시실은 순천 지역에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 오래된 성경을 비롯해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낡은 풍금과 각종 신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국내외 관계자들이 고증을 거쳐 수집한 근대 기독교 관련 유물과 당시의 일상 용품 등 650점이 전시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한국 기독교계에는 ‘북평양·남순천’이라는 말이 있다. 순천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동부지역 선교역사는 한국 개신교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우선 미국 남장로교가 호남에 설립한 선교부 중 순천 지역은 복음선교, 교육선교, 의료선교가 체계적으로 가장 잘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교유적의 하나인 지리산 선교사 휴양시설에서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근대 한글 문법의 체계화에 일정 정도 이바지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가 오늘날 순천 사람들의 정신문화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