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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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Chos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북도 완주군의 역사와 문화.
[개설]
전라북도 완주군은 조선시대 전주부[전라북도 전주시]의 외곽 지역과 고산현이 합쳐진 것으로 1935년에 전주군에서 분리되었다.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 삼례역이 위치했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 호남을 보존했던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의 현장이다.
[행정구역]
전라북도 완주군은 조선시대 전주부 외곽 지역과 고산현 지역이다. 고산현은 전라북도 완주군의 북쪽으로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면적의 대략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조선 멸망 후 1914년에 고산군이 전주군에 통합되었고, 1935년에 전주군이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분리되었다. 조선시대 전주부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격상되었으며, 전라감영이 설치된 전라도의 수부로 종2품의 문관 전주부윤이 부임했다. 17세기 이후는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하고 종5품의 문관 또는 음관 전주판관이 임용되어 실질적인 전주부윤 역할을 했다. 지금 전라북도 완주군에 해당되는 전주부 지역은 대략 소양면, 상관면, 구이면, 오백조면[삼례], 용진읍, 봉상면, 우동면, 우북면 등 8개 면 일원이다. 조선시대 고산현(高山縣)은 백제 이래 고산현과 운제현(雲梯縣)이 합쳐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태조 1) 고산현에 운제현이 편입되어 비로소 하나의 군현이 되었다. 조선시대 고산현은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읍,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등 6개 읍면이 이에 해당된다. 고산읍과 비봉면은 통합 이전 옛 고산현 영역이고,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등 4개 지역은 운제현 영역이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에 고산현은 전주목 속현에서 벗어나 감무관이 파견되었으며, 이듬해인 1391년(공양왕 3) 운제현도 감무관읍이 되어 고산현 감무관이 운제현 감무관까지 겸했다. 1413년(태종 13)에 지방통치체제 개편에 따라 감무가 현감으로 바뀌면서 고산현 감무도 고산현 현감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고산현은 종6품의 음관 현감이 임용되는 읍이었다.
[호구수]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를 통해 우선 전주부에 속했던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8개 면 지역의 호구수를 보면, 소양면 1,166호 4,085명, 상관면 538호 2,348명, 구이동면 1,106호 3,386명, 오백조면[삼례] 1,053호 4,554명, 용진면 915호 3,392명, 봉상면 1,594호 5,756명, 우동면 263호 835명, 우서면 390호 1,438명으로 총 7,025호에 25,794명이다. 고산현의 호구수는 『호구총수』에 총 4,115호, 16,773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이를 합해 보면 1789년 정조 때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호수는 11,140호에 42,567명이다. 현재 면 자체는 전라북도 완주군에 편제되어 있지만, 그 면내 마을들이 전주에 편입된 경우들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현재 완주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정조 때 호구수가 이보다 적었다고 추정된다.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 삼례역]
한양과 지방을 잇는 9개의 대로 중에서 한양과 전라도를 잇는 것은 2개 대로이다. 모두 한양에서 삼례역으로 내려와서 갈리는데, 전주-임실-남원-진주를 지나 통영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삼례역에서 금구-정읍-나주를 지나 해남·제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처럼 삼례역은 호남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전라감사도 황화정에서 신구임 감사가 인수인계를 하고 삼례역을 통해 전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혁명 때도 농민군들이 삼례에 집결해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삼례역참은 오백조면(五百條面)에 속했으며, 오백조면은 1914년에 삼례면으로 개편되었고, 1956년에 삼례읍으로 승격되었다.
[회안대군의 유배와 묘역]
전주는 조선 왕실의 발상지이면서 또 한편으로 건국기 혼돈의 역사도 담고 있다. 제2차 왕자의난을 일으킨 회안대군 이방간이 여러 유배지를 거쳐 전주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이방간의 묘역이 법수메 자락인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금상동에 있다. 태종이 지관을 시켜 묘역의 지혈을 끊었다는 뜸 터 흔적들이 산등성에 남아 있다. 금상동은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에 속했다가 1989년에 전라북도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이방간은 1680년(숙종 6)에 복권되어 이방간과 이방간 후손들이 『선원록』에 수록되었다.
[정여립모반사건과 집터]
정여립모반사건은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선조 22) 전주 출신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서 모반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3년여에 걸쳐 동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기축옥사로 불리는 이 정여립모반사건으로 도내 수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으며, 반역향으로 몰려 호남 사림은 중앙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도내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불러왔다. 남문 밖에 살았다는 정여립의 집터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월암마을 파쏘자리이다. 그런데 월암마을 봉우리의 이름이 파쏘봉이 아니라 파수를 본다는 의미의 파수봉이라고 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전라북도 완주 지역은 임진왜란 때 전주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았던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의 현장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웅치전적비,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이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웅치[곰티재]는 전라북도 진안에서 전라북도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김제군수 정담이 순절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안덕원으로 후퇴했으나 이틀간에 걸친 혈전으로, 왜군의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치는 진산(珍山)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대둔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치전투는 왜군 측에서 임진왜란 3대전의 하나로 꼽을 만큼 치열한 혈전으로 조선군이 대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