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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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峙戰蹟址 |
영어공식명칭 | Ungchi Battlefield |
이칭/별칭 | 곰티재 전투 |
분야 | 문화유산/유형 유산,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노석 |
건립 시기/일시 | 1592년(선조 25) - 웅치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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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76년 4월 2일 - 웅치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9년 - 웅치전적비 설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12년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에 창렬사 건립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6년 - 웅치·이치전적지 기초자료 정밀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웅치전적지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 |
소재지 | 웅치전적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18-1 |
성격 | 전적지 |
지정 면적 | 3,650,609㎡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7일부터 10일 사이에 웅치전투가 있었던 전적지.
[개설]
일본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전주로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감사 이광은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하는 웅치와 이치의 주요 지점에 방어사 곽영(郭嶸), 김제군수 정담(鄭湛), 동복현감 황진(黃進),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을 나누어 배치해서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전주부성에는 남원의 군사를 비롯한 남도의 여러 고을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배치해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이외에도 광주목사 권율 등은 남원, 장수, 임실 등지에서 방어하고 있었다. 황진은 웅치에 있다가 적정을 살피기 위해서 진안 방면으로 나가 일본군 선봉 부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7월 2일경에 일본군이 남원으로 침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광은 황진을 남원 방어를 위해 파견했다. 7월 5일에 일본군이 진안을 거쳐 웅치를 공격하려 하자 이광은 남원으로 파견되었던 황진을 다시 올라오도록 했다. 당시 전주부윤이던 권수(權燧)가 갑자기 병사하자, 이정란(李廷鸞)을 수성장으로 임명해 전주의 수비를 담당하게 하고, 이광은 여러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고산성으로 들어가 주둔했다. 웅치에서는 1진에 의병장 황박(黃璞)이, 2진은 나주판관 이복남이, 웅치 정상의 3진은 김제군수 정담이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7월 7일에 웅치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이들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튿날인 8일 새벽부터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이루어져 저녁 무렵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해 황박과 이복남 등은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해남현감 변응정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그러나 정담은 아군들의 후퇴를 돕기 위해서 웅치 정상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정담 외에도 종사관 이봉, 강운 등 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전사했다. 웅치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전주성으로 향해 9일에는 안덕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황진도 참여해서 결국 일본군을 물리쳤으며, 10일에는 일본군이 웅치를 넘어 진안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러므로 웅치전투는 웅치뿐만 아니라 안덕원전투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정확할 것이다.
[변천]
웅치전투는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1592년 7월 7일부터 8일까지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진안군 부귀면 일대에서 벌어진 웅치전투를 비롯해, 7월 9일에 완주군 소양면 일대와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산정동 일대에서 벌어진 안덕원전투를 포함하는 것이다. 전라북도에서는 1976년에 완주와 진안을 잇는 구 신작로 상의 곰티재 부근인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을 웅치전적지로 설정해서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했다.
[위치]
웅치전투가 이루어진 장소는 좁게 보면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연결하는 웅치에서만 벌어진 전투로 말할 수도 있으나, 넓게 보면 웅치전투와 안덕원전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더 넓혀서 보면 안덕원전투가 벌어진 완주군 소양면과 전주시 금상동, 산정동 지역과 웅치전투가 발생하기 이전 황진 등이 일본군 선봉대를 공격한 진안 내 여러 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이다. 웅치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세 가지 노선이 있다. 첫째는 적천치(笛川峙)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송정마을에서 부귀면 세동리 적천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둘째는 덕봉(德峯)길로 소양면 신촌리 두목마을에서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셋째는 곰티[熊峙]재로 소양면 신촌리 웅리마을에서 부귀면 세동리 부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세 가지 길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두 번째 길이 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에는 첫 번째 적천치길이 이용되고, 근대 이후에 곰티재로 도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웅치전적비가 세워진 지역은 근대에 만들어진 전주-진안 간의 대로가 지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 일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 전투는 덕봉길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웅치전적지는 2016년 『웅치·이치전적지 기초자료 정밀조사』 과정에서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현황]
웅치전적지는 1976년 4월 2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12월에 곰티재 정상에서 약 200m 되는 지점인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쪽에 웅치전적비(熊峙戰蹟碑)를 세웠다.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에는 조선 전기 요광원 터로 비정되는 원터가 있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 등 전승 자료가 전해오고 있으며, 2012년에 웅치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모시는 창렬사(彰烈祠)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