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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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時全羅道熊峙梨峙戰鬪完州 |
영어공식명칭 | Wanju where Ungchi and ichi Battle flare that defend the Jeonrado while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하태규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지켜낸 웅치와 이치 전투.
[도입]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은 호남이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이었으며, 민족사적 위기였다. 그러나 조선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는 하였지만, 왜군을 물리치고 국가를 지키고 왕조를 유지하며 민족사의 연속성을 확보하였다.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지만, 전라도가 보여준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지역군이 동원되어 근왕병으로 출동하여 경기도 용인 지역까지 올라가 왜군과 싸웠으며, 전란이 계속되는 동안 중요한 전투마다 병력이 동원되어 임란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산도대첩을 거둔 이순신과 이억기 휘하의 수군 병력의 주력이 전라도 서남해에서 동원된 장정들이었으며,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지휘한 군대가 전라도 군대였고,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김천일·황진·최경회 등 삼장사 이하 많은 사졸이 전라도 장병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남 곡창으로부터 전란을 버티며 항전할 수 있었던 물자와 군량미의 보급은 물론, 국가의 재정이나 경상도 등 전란에 휩쓸린 지역민의 구휼미까지도 전라도에서 조달되었다. 이순신도 당시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고 말할 정도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시기 전라도가 없었다고 한다면, 조선도 유지될 수 없었다.
임진왜란 극복에 있어서 전라도가 특별히 다른 곳과 달리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5년 동안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방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개전 20일 만에 한양이 점령당하는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왜군의 호남 공격이 이루어졌고, 1592년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되고 전라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지만, 이후 전라도에서는 임진왜란의 초기전황이 반전되는 9월 중순까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를 통하여 왜군을 막아내고 전주성을 지켜 전라도를 보존하였다. 웅치전투는 1592년 7월 8일 전주와 진안의 경계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웅치 일원에서 전주로 공격해 들어오는 왜군을 막아 싸운 전투이며,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산 18-1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치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 전투는 웅치전투 후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퇴각했던 왜군이 진산을 거쳐 이치로 공격해오던 왜군을 막아 격퇴한 싸움이다. 이치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며, 이치전적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26호, 충남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개 1] 조선 민족사적 위치에 처하다.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조선 침공을 시작하여 다음 날인 4월 14일 정발(鄭撥)이 분전한 부산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4월 15일에는 역시 송상현(宋象賢)이 분전한 동래성에 입성하였으며, 곧이어 양산·언양·경주 등을 범하고, 일대는 밀양으로 향하였으며, 일대는 김해를 함락시켰다. 또한 1592년 4월 21일경에는 대구·울산·경주 등이 함락됨으로써 경상도는 60여 고을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한 상태였다. 이처럼 순식간에 경상도를 짓밟은 왜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거침없는 형세로 수도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한편 4월 17일에야 급보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조경(趙璥)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급히 영남으로 내려보냈지만, 이미 영남의 군대가 무너진 뒤의 일이라서 4월 25일 상주전투에서 패배하고 문경을 거쳐 충주로 퇴각하였다. 4월 27일에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주둔한 도순변사 신립(申砬)의 군대가 무너지고 충주가 함락되었다. 다른 한편 일방적으로 밀리는 가운데서도 거창 신창에서는 돌격장(突擊將) 정기룡(鄭起龍)의 용전으로 왜군을 일시 저지하기도 하였으나, 병력의 차이가 워낙 현격하였으므로 대세를 어찌할 수 없었다. 선조(宣祖)는 4월 29일 충주의 패보를 접하고 이윽고 4월 30일 서행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한양으로 향한 왜군이 5월 2일 광나루·마전·사평·동작 등을 통해 한강을 건넘으로써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마침내 5월 3일 왜군이 무저항으로 한양에 입성하여 도성이 함락되었다. 이어서 5월 5일에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 군사를 나누어, 한양으로부터 가등청정은 동쪽으로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하였고, 소서행장·종의지 등은 서쪽으로 해서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양원(李陽元)이 이끄는 군대가 한때 해유령에서 왜군을 포위 섬멸하기도 하였으나 무너지고, 5월 18일 김명원(金命元) 등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마저도 무너져 5월 20일 왜군이 임진강을 건넜다. 선조는 평양 사수를 논의하다가, 6월 11일 평양을 버리고 북행을 계속하여 26일에 의주에 다다르게 되었다. 왜군은 6월 14일 대동강 왕성탄을 건너 평양에 무저항으로 입성하였다. 이에 따라 6월 말이면 조선의 7도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전라도 한 도만 남게 되는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전개 2] 왜군이 전라도를 향해 쳐들어오다.
수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전쟁이 장기화하는 조짐을 보이자, 임진강에서 작전 회의를 갖고 조선을 분할 통치라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5월 중순부터 전라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592년 5월 8일경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들은 임진강에서 조선 8도를 나누어 담당하였고, 여기에서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전라도 침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북으로만 진격하던 왜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려는 이른바 분지지계(分地之計)에 의한 것이었다.
전라도 침공의 임무를 부여받은 소조천융경은 일본 육군의 제6진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처음에 모리휘원(毛利輝元) 등과 같이 바다를 건너와 그 군사를 성주·선산·김산 등 여러 곳에 주둔케 한 다음 한성에 올라와 있었다. 소조천융경은 임진강 전투까지 참여한 뒤 적국의 전라도로 출정하라는 명령을 받고 5월 25일 임진강에서 남하하여 전라도로 향하였다. 소조천융경은 충주를 거쳐 조령을 넘어 6월 9일 선산에 도착하였다. 소조천융경은 선산에서 제7군 대장 모리휘원을 만나 협의하고 부대를 정비한 후 부대를 이끌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충북으로 들어가 황간을 지나 영동-양산-순양을 거쳐 무주와 금산으로 침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조선군 측에서는 전라방어사 곽영(郭榮)은 금산에, 이계정(李繼鄭)은 육십령에,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소조천융경은 황간과 순양을 거쳐서 먼저 6월 19일 무렵 무주로 침입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6월 22일 무렵에는 금산 제원으로 쳐들어 왔다고 보인다. 『용사일기』 임진년 6월 22일 자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장계에 의하면, ‘6월 22일 수를 알 수 없는 적의 무리가 황간으로부터 순양역 근처 민가를 분탕한 후 4방의 진을 결합하였다’라고 하는데, 이는 소조천융경의 동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조천융경의 군사가 전라도 금산을 향하여 쳐들어오자, 6월 22일 금산군수 권종(權棕)이 제원의 저곡성에서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금산을 지키던 방어사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으로 퇴각하여 버림으로써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전개 3] 웅치의 혈투와 안덕원의 승전으로 호남을 지켜내다.
왜군이 금산으로부터 진안을 점령하여 전주부성이 위협을 느끼자,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삼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를 지키게 하는 한편, 방어사 곽영, 동복현감 황진(黃進), 나주판관, 이복남과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이 웅치와 이치의 관아를 지키게 하여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때 웅치의 수비는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제군수 정담은 동복 현감 황진과 더불어 미리 웅치에서 지세와 적정을 살피는 한편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금산 월옹사의 중을 처형하고 목책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2일 왜군이 용담으로부터 장수 방면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를 지키고 있던 황진을 남원 경계로 옮겨 지키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웅치에는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이 남아 파수하게 되었는데, 그때 전 전주만호 황박(黃璞)도 의병 200명을 모아 웅현에 가서 복병하여 조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5일 진안으로부터 적병이 전주로 향하니 이광은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전주 부중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남고산성 만경대 산정으로 나가 진을 쳤다. 그리고 남원으로 파견하였던 황진으로 하여금 다시 웅치로 돌아와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진이 아직 남원으로부터 돌아오기 전인 7월 8일 새벽부터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은 웅치 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권율은 전라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호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황진도 전라감사 이광의 명에 따라 남원으로부터 오는 도중에 있었으므로 실제로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고 여기에 전라감사 이광이 군사를 보내 응원하였다.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에 나가 지키고, 나주판관 이복남은 제2선을, 그리고 김제군수 정담은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하여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아 싸웠다. 이때의 상황이 『선조실록』이나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웅치에 침입한 왜적의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봉 부대만도 수천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선봉 부대의 공격에 대하여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싸워 물리쳤으나, 해가 뜬 뒤에 적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고 이날 오전 오각의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화살이 떨어져 소란한 틈을 타서 왜군은 다시 전면 공격을 가해왔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 등은 후퇴하여 안덕원에 주둔하고,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휘하의 장정들이 끝까지 사투를 전개하여 김제군수 정담을 위시하여 종사관 이봉, 강운 등의 장정들이 전사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도 김제군수 정담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호남 방어군의 용맹에 감동한 적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러운 넋을 조상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웅치에서 벌어진 아군과의 접전에서 가까스로 웅치를 넘은 왜적은 아군이 무너진 틈을 타서 7월 9일경 전주 부근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왜적은 전주부성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안덕원 너머에서 아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웅치에서 큰 타격을 입고 주력부대가 무너짐으로써 전력이 상실된 잔여세력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안덕원에는 웅치에서 퇴각한 이복남 등이 이미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전주 부중에서는 이정란과 전라감사 이광 등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이광의 명으로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웅치로 가던 동복현감 황진이 전주에 도착하여 이들 왜적을 안덕원 너머에서 격파하게 되었다. 즉, 황진의 반격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한 왜군은 소양평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황진은 밀어붙여 대승리 골짝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을 ‘안덕원싸움’이라고 하는데, 웅치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황진이 사용한 칼은 그가 1590년 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에 갔을 때 사 온 일본도였다고 하며, 그리고 세마천은 싸움에서 승리한 황진의 군대가 전마를 씻은 곳이라고 전한다. 안덕원전투에서 황진에게 패배한 왜적은 진안, 용담을 거쳐 금산으로 퇴각하였다.
이 웅치전이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는가 하는 것은 당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추인물이었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을 웅치전 때문이라고 평하고 있다. 즉, ‘적병의 용맹 있는 자는 웅령싸움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기운이 이미 다 없어졌다’라고 말하고 ‘전라도 한 도 만이라도 보전되게 된 것이 이 싸움으로 인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행주대첩의 주장인 권율도 후일 그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에게 자신이 전란 중에 거둔 전공이 웅치의 공이 행주의 공보다 위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권율이 웅치에서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웅치전에서 왜군을 물리친 전라도 군대가 형식상 전라도도절제사였던 권율의 휘하 사졸이었다는 점에서 권율 자신의 전공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황진의 행장에 의하면, 일본 승 화안(和安)이 연위사(延慰使)로 조선에 와서 자신들이 전쟁 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결국 전라도 때문에 조선 정복에 실패하였으므로 가장 크게 패한 전투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개 4] 이치를 침공한 왜군을 막아 호남을 지키다.
웅치전투 직후인 7월 9일 의병장 고경명이 호남 의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금산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날인 10일 패배하고 고경명이 순절하였다. 이후 금산의 왜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고, 특히 7월 20일경에는 진산에 침입하여 관사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웅치전투와 안덕원에서 왜군의 침공을 격퇴한 전라도 관군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주둔하고 있는 왜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각지의 수령들이 거느리는 군사들을 진산·용담·진안·장수 등지에 분산 배치하여 금산성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금산성으로부터 공격해 들어오는 왜군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금산성을 점령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한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전라도 관군이 금산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을 때, 왜군 수천이 진산을 다시 공격해 오고 이를 이현[이치]의 복병장인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크게 물리치는 이치전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치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다. 일찍이 일본인 연구자인 지내굉(池內宏)은 위의 『난중잡록』 기사에 근거해서 이치전이 벌어진 날짜를 7월 20일로 설명한 바도 있었으며, 일부 지역사 연구자 중에는 그 시기를 7월 10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의 연구성과에서는 7월 20일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그런데 『쇄미록』의 기사를 보면, 이치전투는 8월 17일경에 전개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전라도 군사들이 8월 7일에 금산에 들어가 왜군을 치기로 약속하였지만, 전주에 있던 방어사 곽영의 전령이 와서 모이지 말도록 중지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광주목사 권율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다시 8월 9일에 공격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8월 9일에 용담 송현에서 부안·남평·무장·흥덕·보성·남평의 현감이 거느리는 군사들이 왜군을 공격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여 남평현감 한순과 병사 500명 이상이 전사하고 말았다.
전라도 관군이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다 실패한 뒤인 8월 17일경 금산의 왜군 400여 명이 다시 진산을 거쳐 이치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 싸움에서 동복현감 황진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진격하는 왜군을 막아 싸웠으나 전투 막판에 중상을 입고 쓰러지자 왜군은 다시 진격하여 왔다. 이때 광주목사 권율의 지휘 아래 편장 위대기, 공시억 등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이치전투는 당시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이 거느리는 전라도 관군이 웅치전투에 이어, 진산에서 이치를 향해 공격해오는 왜군을 격퇴하여 임란 초기 호남 방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그 의미가 높이 평가되는 전투이다. 백사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그의 장인인 권율의 이치 전공에 대하여 “적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여기를 근본으로 삼아서 나라를 위하여 수년지간을 보장하게 하였으며, 동서로 비만(飛輓)하여 군수가 한 번도 부족됨이 없었음은 공의 힘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본 일본 승 화안(和安)이 웅치전투에 대하여 한 이야기이다. 이치전투가 권율과 황진 등이 왜군을 일방적으로 패퇴시킨 승첩으로서 앞에 있었던 웅치전보다 그 중요성이 더 크게 인식되면서 ‘웅치’가 ‘이치’로 바뀌어 실록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인식은 적어도 이치의 전공이 웅치전투와 대등하다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치전투의 의의 또한 웅치전투 못지않은 것이다.
[결말] 왜군이 금산성에서 철수하고 호남이 지켜지다.
이치전투에서 패퇴한 왜군이 금산성으로 철수할 무렵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이 금산성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날 고경명과 함께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던 의병장 조헌은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한 뒤, 8월 17일 칠백의사를 거느리고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다음 날인 18일 순절하였다. 또한 조헌의 금산성 제2차 전투 후에 조헌과 함께 금산성을 치기로 하였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해남현감 변응정이 열흘 뒤인 8월 27일 금산성을 공격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처럼 6월 23일 왜군이 금산성에 들어온 이후 8월 말까지 극도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호남이 버티어 주고 있을 때, 조선의 관군이 대열을 정비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이어서 명군이 도착함으로써 9월 이후 점차 전황이 조선에 유리하게 되었다. 이에 왜군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주력부대를 제외하고 평안도로 북상하였던 병력을 경상도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금산의 왜군도 바로 그해 9월 17일 경상도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초기에 극도로 불리하던 상황에서 조선의 마지막 보루인 전라도를 공격하던 왜군은 호남 점령에 실패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물론 다음 해인 1593년 진주성 제2차 전투의 고비가 또 한 번 있었지만, 마침내 전라도는 임진왜란 5년 동안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