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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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德之 |
영어공식명칭 | Choi Deok-ji |
이칭/별칭 | 가구(可久),연촌(烟村),존양(存養),문숙(文肅)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출생 시기/일시 | 1384년(우왕 10) - 최덕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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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05년(태종 5) - 최덕지 을유식년시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455년(세조 1) - 최덕지 사망 |
출생지 | 최덕지 출생지 - 전라도 전주 |
묘소|단소 | 최덕지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
사당|배향지 | 최덕지 배향지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녹동서원]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인.
[가계]
최덕지(崔德之)[1384~1455]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의다. 고조할아버지는 최아(崔阿), 증조할아버지는 최용봉(崔龍鳳),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다.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고, 외할아버지는 경덕재(經德齋) 박종수(朴從壽)이다. 첫째 형은 최광지, 둘째 형은 최직지로 둘 다 문과에 급제해서 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셋째 형은 최득지이고, 최덕지는 넷째이다. 부인은 평양조씨로 중랑장(中郎將) 조안정(趙安鼎)의 딸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최조(崔凋)로 호군(護軍)이고, 둘째는 최별(崔撇)로 사용(司勇)이고, 셋째는 최숙으로 생원이다. 첫째 딸은 충찬위어모장군(忠贊衛禦侮將軍)을 지낸 서흥김씨 김총(金緫)[?~1502]에게 출가했으며, 둘째 딸은 거창신씨 신후경(愼後庚)에게 출가했다. 김총은 서흥김씨의 입향조이고, 신후경은 거창신씨 영암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최덕지는 1384년(우왕 10)에 전주에서 출생했다. 『문과방목』에 따르면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생원시에 입격됐다고 보아야 한다. 최덕지는 22세가 되던 1405년(태종 5)에 실시된 을유식년시에서 급제했다. 이후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10년(태종 10) 6월 25일에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호천상제의 제문만 있고 오제의 제문은 준비하지 못해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 후 삼사의 직을 역임했다. 1425년(세종 7)에 지함양군사가 됐으며, 1436년(세종 18)에는 지김제군사가 됐다. 이때 논공법을 상소해 세제의 개혁에 공헌도 했다. 남원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451년(문종 1) 68세의 최덕지는 예문관직제학으로 있다가 노쇠함을 이유로 전리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이때 문종이 “지난번 윤대에서 최덕지와 말을 해 보니, 사람됨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아직 그다지 늙지도 않았었다. 머물러 두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니, 도승지 이계전이 대답하기를 “돌아갈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라고 해서 퇴임을 허락했다. 이때 세상에는 나이를 무릅쓰고 억지로 조정에 서는 자가 많은데, 최덕지는 아직 치사(致仕)할 나이에 이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당시의 의논이 최덕지를 칭찬했다고 『문종실록』에 기록됐다. 문종은 최덕지에게 영정 1본과 어전 진상 유지 초본을 하사했고, 동료 문인이던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이개 등 28명은 송별시를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학문과 저술]
최덕지는 『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1805년(순조 5)에 최세영이 최덕지의 글을 묶어 편찬한 『연촌유고(烟村遺稿)』에 「논공법답험편부소(論貢法踏驗便否疏)」와 「존양루시(存養樓詩)」, 「공원시(貢院詩)」 등이 실려 있다.
[묘소]
최덕지의 묘소는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덕지는 1455년(세조 1)에 사망한 뒤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578년(선조 11) 최덕지의 영정은 후손들에 의해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었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1630년(인조 8) 존양사(存養祠)로 창건] 등에 배향되었다. 영정 등은 보물 제594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