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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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得之 |
영어공식명칭 | Choi Deuk-ji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출생 시기/일시 | 1379년(우왕 6) 10월 15일 - 최득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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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14년(태종 14) - 최득지 승훈랑으로 전구령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415년(태종 15) - 최득지 황간현감으로 나감 |
활동 시기/일시 | 1419년(세종 1) - 최득지 예빈시주부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420년(세종 2) - 최득지 사헌부감찰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25년(세종 7) - 최득지 공조좌랑에서 장수현감으로 임용 |
활동 시기/일시 | 1439년(세종 21) - 최득지 고산현감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444년(세종 26) - 최득지 조봉대부로 선공감부정에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447년(세종 29) - 최득지 조산대부에 올라 한성부소윤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455년(세조 1) - 최득지 사망 |
출생지 | 최득지 출생지 - 전주 |
묘소|단소 | 최득지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문인.
[가계]
최득지(崔得之)[1379~1455]의 고조할아버지는 최아(崔阿), 증조할아버지는 최용봉(崔龍鳳),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다.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고, 외할아버지는 경덕재(經德齋) 박종수(朴從壽)이다. 첫째 형은 최광지, 둘째 형은 최직지로 둘 다 문과에 급제해서 집현전직제학을 지냈다. 넷째 동생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최덕지(崔德之)이다. 부인은 여산송씨로 중랑장(中郞將) 송지손(宋智孫)의 딸이다. 여산송씨는 어진 덕행이 있었으며 묘를 합장했다.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장남은 최자목(崔自睦)으로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냈다. 둘째는 최자인(崔自姻)으로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셋째는 최자임(崔自姙)으로 사정(司正)을, 넷째는 최자공(崔自公)으로 현감을, 다섯째는 최자검으로 사정을 지냈다.
[활동 사항]
최득지는 1379년(우왕 6) 10월 15일에 전주에서 출생했다. 15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8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406년(태종 6)에 어머니 상을 당해 몹시 슬퍼함으로써 몸이 여위도록 상중의 일에 진력했다. 1413년(태종 13)에 조정의 의논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다는 이유로 장흥교수로 천거해 제수했다. 1414년에 승훈랑으로 전구령이 됐고, 1415년(태종 15)에 황간현감으로 나갔다. 1419년(세종 1)에 예빈시주부가 됐고, 1420년에 사헌부감찰에 제수됐으니, 어사마를 탄 지 3년, 사헌부를 주관한 지 넉 달 만에 대궐 내 호걸들이 숙연하게 공경하며 두려워했다. 1425년(세종 7)에 공조좌랑에서 장수현감으로 임용됐으며, 1430년(세종 12)에 의영고사로 전보됐으나 어버이 연세가 많음을 이유로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고 어버이를 모셨다. 1431년(세종 13)에 금구현령에 제수되었으나 어버이 섬길 날이 짧다는 이유로 한사코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34년(세종 16)에 아버지 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며 능히 효도를 다 했다. 1439년(세종 21)에 세종이 불러 고산현감으로 삼으니 재차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사를 살핀 지 6년 만에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했다. 1444년(세종 26)에 조봉대부로 선공감부정에 승진했으나 얼마 후 제용감 부정으로 옮겼고, 1447년(세종 29)에 조산대부에 올라 한성부소윤에 제수됐다. 얼마 안 되어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오르자 국사에 우려할 만한 일이 많아 최득지는 늙음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해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1455년(세조 1)에 나이와 덕행으로 특별히 예의를 갖추어 우대했다. 1455년 7월 6일에 향년 77세로 사망했다. 최득지가 죽자 고산 사람 중에 통곡하며 재물을 올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최득지가 고산현감으로 있을 때 관찰사 하연이 순시 차 고산에 들러 삼기정 터를 둘러보고 물과 돌과 소나무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울려 ‘삼기’라는 글자를 판자에 써 주었다. 당시 현감이었던 최득지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관찰사에게 기문을 청해서 편액에 새겨두니 현재까지 기문이 남아 있다. 그 후 정자는 훼손되어 없어졌으나 최득지의 후손들이 이곳 옛터를 복원해 정자를 세우고 삼기정 비에 이러한 내용을 새겨 세웠다. 후에 사헌부대사헌을 제수받았다.
[묘소]
최득지의 묘소는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전주최씨 선산에 자리하고 있다.